항목 ID | GC069003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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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光武量田 |
영어공식명칭 | Gwangmu Land Survey Project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기도 시흥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양훈도 |
[정의]
1900년 지금의 경기도 시흥 지역에서 양안 작성을 위해 진행되었던 근대적 토지 조사 사업.
[개설]
대한제국 고종 황제의 명에 의하여 1899년부터 1901년에 걸쳐 충청남도와 경기도의 실제 토지 측량 작업이 진행되었고, 양전(量田)에 토대한 양안(量案)[조세 부과를 목적으로 전지를 측량하여 만든 토지대장]이 만들어졌다. 지금의 경기도 시흥 지역은 당시 안산군과 인천부에 속해 있었다. 인천부의 광무양안(光武量案)은 현재 남아 있지 않고, 안산군의 광무양안만 남아 있다.
[역사적 배경]
조선 후기 삼정(三政)의 문란 가운데 전정(田政)의 문란은 정확한 토지 측량이 되지 않았다는 데 원인이 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따르면 양안 작성은 20년마다 한 번씩 이루어져야 하나, 전국적인 양전은 1720년(숙종 46)이 마지막이었다. 개화기에 이르러 양전은 개혁의 출발점으로 인식되었으나 미루어지다가 1898년 고종 황제의 의지로 양전이 시행되었다.
[경과]
1900년 8월부터 지금의 시흥시에 해당하는 안산군 초산면과 마유면의 토지 측량이 시작되었다. 조사원이 직접 나가 측량을 하였으며, 토지 소유 관계를 파악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당시 측량 기록을 정리하여 편집한 안산군 광무양안의 중간 편집본[중초책(中草冊)]이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 남아 있다.
[결과]
양전은 토지 소유주나 경작자가 조세를 피하기 위해 토지대장에 올리지 않은 땅[은결(隱結)], 토지 등급을 속인 땅 등을 찾아내고 토지 소유자와 경작자를 정확히 파악하는 데 효과가 있었다. 안산군 광무양안에 따르면 양전을 통해 새롭게 토지대장에 올리게 된 전답이 21%가량 늘어났다. 광무양전 사업 지역 전체인 203개 군의 전답 증가 평균은 23%였다. 안산군 광무양안에 기록된 논과 밭의 비율은 71대 29였다. 예전 논과 밭의 비율이 51대 49였던 사실과 비교하면 논이 크게 늘어났다. 논의 증가는 수리 시설 개선, 개간 증가 등에 따른 결과였다.
[의의와 평가]
광무양전은 농업 시대 국가 재정의 기초인 농경지의 면적과 위치, 토지 등급, 소유 관계 등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한 것이다. 개화기 들어 양안을 다시 작성해야 한다는 논의가 무성했으나, 1895년 갑오개혁 때도 시행하지 못하였다.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한 이후 고종이 칙령을 반포하여 강력한 시행 의지를 보이고서야 양전과 양안 작성이 진행되었다. 광무양전은 시흥 지역에서 최초로 이루어진 근대적 토지 측량 사업이라는 데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