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900361 |
---|---|
한자 | 土地所有權紛爭 |
영어공식명칭 | Land-Ownership Disputes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기도 시흥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방문식 |
[정의]
경기도 시흥에서 일제강점기 토지 조사 사업 과정 중 토지 지배 권리를 두고 발생한 다툼.
[개설]
일제강점기 시흥 지역에 있었던 토지 소유권 분쟁은 1912년 무렵 일제의 조선 토지 조사 사업(朝鮮土地調査事業)과 관련하여 발생하였다. 학술적 연구는 일제의 사업이 불법적으로 사적 소유권을 약탈하였다는 명제에서 출발하였다. 일제의 토지 조사 사업은 제국주의 식민지의 장기적 경영과 수탈을 위하여 인적·물적 자원의 현황을 파악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한편으로 조선 후기 이래 내재적으로 성장해 온 사적 소유권의 관념을 근대적 소유권으로 인정하게 된 계기의 일환으로 작용하였다. 앞서는 역사적인 시각이고, 후자는 과정과 결과에 대한 시각이다.
일제의 토지 조사 사업은 조선 전체에 광범위하게 이루어졌지만 각 지역에서 실제 이루어졌던 토지 조사 사업은 다양한 양상을 보였다. 토지 조사 사업은 국유지와 민유지의 소유권 관계를 정리하는 데서 비롯되었다. 시흥 지역에서 있었던 토지 분쟁도 토지의 경계와 소유권의 구분에서 발생하였다. 특이한 점은 국가나 일제에만 유리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기보다 토지의 민간 소유권이 인정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소유권은 국가가, 수조권(收租權)은 민간이 갖는 전통적 방식의 토지 소유 관계를 해체시키는 결과를 낳았는데, 이는 시흥 지역의 사례로 확인된 것이다.
[역사적 배경]
조선은 후기에 이르러 근대적 토지 소유의 단계로 나아가고 있었다. 조선시대 전 기간에 걸쳐 결부제(結負制)에 입각한 국가의 토지 지배 방식이 해체되고, 조세법정주의에 기초한 균등 과세 방식으로 전환되어 가고 있었다. 특히 광무 연간에 실시한 조선 왕조의 양전 사업(量田事業)[1898~1904]에서는 과거의 토지 제도 개혁 논의를 집대성한 것으로 역사적 의의가 크다. 토지의 지형, 면적, 등급, 지주·소작 관계 및 토지 소유 관계를 명시한 『광무양안(光武量案)』과 「지계(地契)」를 발행하였다.
광무양전 사업의 핵심은 종전의 모든 매매 문서를 거두어 새로운 관계(官契)를 발급함으로써 국가가 개인의 토지 소유권을 공인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사업은 일본의 러일전쟁[露日戰爭] 도발과 조선 보호국화 정책으로 중단되었다. 그 결과 근대적인 토지 조사는 1912년 이후 조선총독부에 의해 ‘조선 토지 조사 사업’이란 이름으로 강제되었다.
일제의 토지 조사 사업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첫째는 일본인 토지 소유를 보증하고 촉진하며, 둘째는 조선 정부의 재정적 기초를 해체하기 위한 것이었다. 전자는 토지 소유권 증명 관련 법을 제정하는 방식이었다. 이에 따라 일본인의 소유권을 절대적으로 보호하는 등기 제도 시행을 위해 전국적인 조사가 실시되었다. 후자는 황실 재정 정리 과정에서 국유 역둔토(驛屯土)를 재설정하는 것이었다. 황실 재정의 국유지는 광무 연간에 내장원(內藏院)에 집중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많은 민유지가 국유지로 편입되었다. 때문에 농민들은 토지 소유 문제로 분쟁을 일으켰지만 조선 황실에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제의 정책은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래 모든 황실의 토지는 국유로 이관하는 것이었다. 기존 조선 황실의 국유지는 민유지가 혼입되었기에 분쟁의 씨앗을 갖고 있었다. 일제는 토지를 점탈하기 위해 조선 황실이 민유지를 확보한 사정 결과를 계승하고자 하였다.
[경과]
일제는 개별 납세 대상자를 파악하기 위해 1908년부터 1910년까지 결수연명부(結數連名簿)를 작성하였다. 지주는 소유한 토지에 대해 최초로 신고하게 되었으며, 이를 기초로 1911년 지주 납세를 권유하는 통첩을 발행하였다. 이때 작성된 기록은 1912년부터 토지 조사 사업에서 토지 신고서와 대조하여 소유권 확정에 활용되었다. 중간 과정은 1910년 3월 토지조사국을 설치하여 토지 조사를 본격적으로 실시하였고, 8월 '토지조사법'을 공포하였으며, 9월 '조선총독부임시토지조사국'을 설치하여 토지 측량 등의 기술적 작업을 진행하였다.
1912년 8월 '토지조사법'을 폐지하고 '토지조사령'을 공포하였는데, 이때부터 비로소 '조선 토지 조사 사업'이 본격적으로 실시되었다. 사업의 구체적인 경과는 소유권 조사와 지가 조사로 나뉘었다. 소유권 조사는 다시 준비 조사, 일필지(一筆地) 조사, 분쟁지 조사로 분류된다. 준비 조사는 토지 신고서를 배포하고 해당 지역의 경제 및 관습을 조사하는 것이다. 일필지 조사는 측량에 의거하여 지주, 지목, 지번을 나누어 조사하는 것이다. 분쟁지 조사는 한 토지에 2명 이상이 소유권을 주장하는 신고서가 제출되었을 경우 화해 조정을 시도하는 것이다. 화해가 되지 않으면 분쟁지로 처리하여 '분쟁지심사위원회'로 넘겼다.
경기도 시흥 지역에서 일제의 토지 조사 사업 과정에서 이루어진 소유권 조사와 분쟁지 조사에 대한 연구 자료는 군자면, 소래면, 수암면 토지 조사부이다. 토지 조사 사업에 따르면 민유지 신고가 먼저 끝난 다음 국유지 통지가 이루어졌다. 시흥 지역 분쟁의 대다수는 민유지와 국유지 간에 발생하였다. 이때 국유지는 탁지부(度支部)에서 발송하는 국유 통지서가 토지 신고서를 대신하였다. 실제 시흥 지역의 토지 신고서 접수는 이미 1910년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기록에 따르면 군자면은 1910년 10월 하순부터 11월 하순까지 민유지 신고가 이루어졌으며 국유지 통지는 1911년 6월까지 이루어졌다. 소래면은 1910년 11월 중순부터 1911년 1월까지 민유지 신고가 이루어졌고, 국유지 통지는 1911년 1월까지 이루어졌다. 수암면은 1910년 9월 중순부터 1911년 3월까지 민유지 신고가 이루어졌고, 국유지 통지는 1911년 8월까지 이루어졌다. 오이도는 1911년 8월 19일 민유지 신고가 대부분 접수되었다. 하중리가 가장 늦었는데 이것도 같은 해 7월 9일까지는 이루어졌다. 하중리가 늦은 이유는 분쟁지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이때 조사된 시흥 지역의 총필수는 1만 9986필, 분쟁지는 190필 20만 9269평으로 분쟁 비율은 1.0%이다. 같은 시기 전국 사정 필수는 1910만 7520필, 분쟁지는 9만 9445필지로 약 0.52%였다. 전국 비율과 비교하면 시흥 지역은 분쟁 비율이 높은 편이었다.
일제는 『토지조사부』에 호수별, 지목별 분쟁지에 일련번호를 부여하여 정리하였다. 시흥 지역의 토지 분쟁과 관련된 문건은 분쟁 183호, 분쟁 184호, 을133호, 을412호, 을456호 등 총 5건이다. 1910년 9월 22일 접수된 분쟁 183호는 수암면 하상리, 1910년 9월 20~21일 접수된 분쟁 184호와 을456호는 수암면 하중리, 1911년 12월 9일 접수된 을412호와 1913년 10월 17일 접수된 을133호는 각각 소래면 매화리와 옥길리의 분쟁지였다. 특히 하중리는 전체 필지 수의 1/4이 분쟁지였을 정도로 대규모 분쟁이 발생하였다. 국유지와 민유지 사이의 분쟁인지 여부는 직접적으로 확인하기 어려우나 시흥 지역에 있었던 용동궁장토(龍洞宮庄土), 석장둔토(石場屯土), 장용영둔토(壯勇營屯土), 내수사둔토(內需司屯土) 등 국유지가 광범위하게 존재하였다는 점에서 국유지 분쟁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용동궁장토는 수암면, 석장둔토는 군자면 장현리·월곶리·정왕리, 장용영둔토는 수암면 산현리 등에 국유지를 두었다. 용동궁장토와 석장둔토 등은 토지 조사 사업 무렵까지 소유권이 불분명하거나 민유지와 섞여 있어서 분쟁의 여지가 많은 곳이었다. 일례로 1895년 11월 탁지부에서 인천부로 보낸 공문에 석장둔토 작인(作人)들이 민유지로 여기고 국가 공유지의 세금인 도조(賭租)를 내지 않으니 시정해 달라는 의견을 보였다. 일제의 분쟁지조사위원회는 석장둔토와 용동궁장토의 일부를 민간에게 환급해 주었다. 이후 분쟁지 조사 과정의 대략이 민간에게 오히려 유리하게 이루어져 마지막까지 남은 시흥 지역의 불복 신청지는 2건만 기록되었다.
[결과]
시흥 지역의 불복 신청지는 군자면 장현리의 소유권 분쟁과 수암면 하중리의 경계 분쟁이었다. 조선총독부 관보 재결서에 따르면 전자는 1915년 5월, 후자는 1915년 10월의 결정에 대한 불복이었다. 소유권 분쟁 건은 군자면 장현리 거주자인 정동섭의 신청에 대한 고등토지조사위원회의 결정이었다. 정동섭은 원래 자기 토지였는데 지주총대(地主總代)[총독부의 토지 조사 사업을 추진하는 선봉대]가 잘못 안내하여 마을의 소유로 사정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장현리 이장 권준영, 군자면장 김현광, 시흥군수 홍종국이 토지 소유권 명의 정정 승락서를 제출하였다. 되짚어 보면 장현리 관리인 유주환의 토지 신고로서 장현리 소유로 사정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사정 당시에 토지 신고서를 제출하지 않았어도 이후 증거를 갖추면 소유권을 되찾기도 하였다. 경계 분쟁 건은 인접한 두 필지의 경계를 조정한 것이다. 관계 지주 김응환과 김창석이 정정 도면을 첨부하여 불복신청하였고, 일제는 내용을 받아들여 민간의 손을 들어주었다.
[의의와 평가]
일제강점기 관련 연구에서도 일제의 토지 조사 사업 이후에 수립된 근대적 토지 제도의 성격과 토지 소유권의 확정 과정에 대한 논란이 있다. 또한 근대적 토지 소유권 자체에 대한 의문과 조선에서 이루어졌다고 본 '수조권적 토지 지배'의 실체에 대한 의문도 있다. 말하자면 조선에서 꾸준히 이루어진 전통적 방식의 토지 지배가 조선 후기에 이르러 당시 현실적 여건에서 자연히 소멸되는 과정이었는가에 대한 의문이기도 하다. 다만 이에 대해 몇 가지 역사적 의의를 찾으면, 첫째 국유와 민유의 구분을 명확히 했다는 점, 둘째 조선 후기까지 내려온 전통적 토지 지배 관념과 공동체적 토지 소유 관념이 종식되었다는 점, 셋째 결부제에 입각한 토지 지배 방식이 해체되고 조세법정주의의 균등 과세를 표방하게 된 점 등을 들 수 있다.
시흥 지역의 분쟁 처리 사례에서 살필 수 있는 내용은 조선시대부터 이어 내려온 국유와 민유에서 발생한 토지 소유권 분쟁이 정리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토지 조사 사업 과정 중 전국에 비해 시흥 지역의 토지 분쟁 비중은 높았으나 실제로 마지막까지 불복한 사례는 2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분쟁지심사위원회의 결정이 반드시 국가에만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단순히 일제가 조선 백성들의 편에 서서 그들에게 유리하게 판결을 내린 것만도 아니다. 그보다는 장기적인 식민지 경영의 일환에서 점탈할 토지를 확보하고 행정적인 영향력을 확장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