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7000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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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世居姓氏 |
영어공식명칭 | Residing for generations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강원도 삼척시 |
집필자 | 심일종 |
[정의]
강원도 삼척 지역에 여러 대(代)에 걸쳐 거주하고 있는 토착성씨와 이거(移居)해 온 성씨.
[개설]
성씨(姓氏)는 성(姓)과 씨(氏)를 결합한 말인데, 중국에서는 성은 천자(天子)에게서 생기고 씨는 제후(諸侯)에게서 생겼다고 한다. 『예기』에는 천자가 제후에게 출생 지명을 따라 성을 주고 봉(封)한 지명을 따라 씨를 명하였으므로, 성은 그 조상의 근본을 통할하고 씨는 그 자손의 유래를 분별한다고 한다. 또한 성은 혼인(婚姻) 관계를 분별하고 씨는 귀천(貴賤)의 등위를 분별한다고 한다. 이렇게 성과 씨를 구분하던 것을 한나라 때부터 사람들이 이를 통틀어서 성(姓)으로 호칭하게 되었다. 중국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에서도 오래전부터 성과 씨를 구분하지 않고 사용했다고 한다. 이중환은 『택리지(擇里志)』에서 우리나라의 성씨의 보급을 고려 초로 보면서, 사성(賜姓)에 의한 성씨와 그 이전부터 있던 성씨, 그리고 중국에서 도래한 성씨 등 세 가지가 있다고 하였다.
[삼척의 주요 세거성씨]
삼척 지역의 세거성씨에 대한 기록이나 자료는 우선 조선후기 이후 각 성씨별로 편찬된 족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족보를 오늘날 인구조사와 비교해 봄으로써 삼척 지역의 세거성씨의 변천도 윤곽을 드러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런데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세거성씨라고 할 때, 특정한 본관성씨가 여러 대에 걸쳐 삼척 지역에 씨족을 이루어 살았다는 사실이다. 특히 세거성씨는 조선 후기의 사회현상 가운데 하나인 집성촌의 존재와 결부지어 논의 할 때 그것의 지역사적 의미가 찾아질 것으로 본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전역에 걸쳐 최초로 동족집단지가 조사된 것은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가 처음이다. 당시 조선총독부 촉탁으로 있던 젠쇼 에이스케[善生永助]는 『조선의 취락(朝鮮の 聚落)』 과 『조선의 성(朝鮮の 姓)』에서 조선의 마을을 본관성씨별로 구별하고 세거성씨의 호수[15호 이상인 곳만]를 기록하고 있다. 삼척 지역도 마찬가지로 자료가 남아 있는데, 당시 삼척군에는 20여 본관성씨가 120여 곳의 마을에서 동족촌을 이루며 세거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케 해준다.
당시 세거성씨로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삼척시를 본관으로 삼는 성씨 가운데 삼척김씨 46곳의 동족촌과 삼척심씨 두 곳의 동족촌이 보일 뿐이다. 이는 삼척진(陳)씨와 삼척박씨 그리고 사성인 삼척진(秦)씨가 당시 삼척시에 세거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동족촌을 이룰 만큼 그 씨족의 후손들이 확산되지는 않았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1930년대 무렵 삼척을 본관으로 쓰는 성씨는 두 성씨에 불과하지만, 타 지역을 본관으로 삼으면서 삼척 지역에 세거하는 성씨의 동족촌은 눈에 띄게 많다는 것이다. 당시 밀양박씨는 15 곳 정도의 동족촌이 있었으며, 강릉최씨, 강릉김씨, 김해김씨, 전주이씨, 남양홍씨 등 또한 6~8 곳 정도로 비교적 많은 분포를 보이고 있었다. 무엇보다 당시 20여 본관성씨는 거의 대부분 300~600여 년 전 이미 삼척 지역에 이거하여 세거한 양상을 보여준다는 것을 각 집안의 족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삼척 지역 세거성씨는 본관성씨만의 세거지도 아니었고, 타 본관성씨 또한 이거하여 누대를 거치는 동안 삼척시의 문화를 지키며 다음 세대로 전해주는 역할을 맡기도 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삼척 지역으로 이거하여 정착한 집안들 중에는 현달한 인물들이 많아 삼척시의 문화를 더 한층 고양시키기도 하였다. 따라서 삼척 지역의 세거성씨에 대한 이해는 곧 삼척 지역의 인물사며 문화사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