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5002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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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1872年郡縣地圖茂朱府 |
영어공식명칭 | Gunhyeonjido In 1872 Mujubu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유물/서화류 |
지역 | 전라북도 무주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최진성 |
[정의]
1872년에 제작된 군현 지도에 수록 되어 있는 무주부 지도.
[개설]
『1872년 군현 지도』 「무주부」 는 흥선 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명령으로 그린 지도로, 당시로서 가장 자세한 지리 정보를 수집하여 모은 지도였다.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형태 및 구성]
전라도의 무주를 포함하여 전국 8도를 부(府), 목(牧), 군(郡), 현(縣)별로 그린 지도로, 각 장마다 크기가 약간씩 다르나 대략 가로 25㎝, 세로 35㎝로 된 채색 지도이다. 『1872년 군현 지도』「무주부」는 조선 후기의 무주군에 속한 무주 읍치(邑治)와 무주 적상산성(赤裳山城)을 중심으로 부내면(府內面), 상곡면(裳谷面), 서면(西面), 신동면(新東面), 유가면(柳加面), 이안면(二安面), 일안면(一安面), 풍남면(豊南面), 풍동면(豊東面), 풍서면(豊西面), 횡천면(橫川面) 등을 비롯하여 각 면에 속한 마을[里]이 기록되어 있다. 이와 함께 무주 읍치는 동헌을 포함한 관아(官衙), 객사(客舍), 아사(衙舍), 옥(獄) 등의 행정 경관, 향교(鄕校), 사직단(社稷壇), 여단(厲壇) 등의 제사 경관이 그려져 있다.
무주 적상산성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보관하고 있던 사고(史庫)를 중심으로 산성의 출입을 위한 동서남북의 통로와 호국사(護國寺)를 포함한 인문 경관들이 그려져 있다. 또한 도로와 마을 등의 인문 경관과 함께 주요 산과 고개 및 하천과 호수 등의 자연 경관도 그려져 있다. 대표적으로는 적천(赤川)이 무주 읍치의 앞을 지나 금산군으로 흘러가고 있으며, 차산리 앞에 유일한 교량인 남교가 그려져 있다. 인문 경관으로는 누정(樓亭)인 한풍루(寒風樓)와 읍취루가 그려져 있다. 이 가운데 한풍루는 전주의 한벽루 및 남원의 광한루와 함께 전라도 3대 누정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사찰인 북사(北寺)[북고사라고도 함]가 향로봉(香爐峯)[향로산이라고도 함]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무주 읍치는 『여지도서(與地圖書)』 전라도 산천(山川) 조에 '고을의 으뜸이 되는 산줄기'로 표현된 향로봉 아래 자리잡고 있다'고 되어 있다. 현재의 무주군 무주읍 읍내리 일대로 지도에는 부내면으로 표시된 곳이며, 무주 군청과 무주 초등학교를 중심으로 하는 주변 지역이다. 읍성이 있던 읍치는 아니더라도, 조선 시대에는 풍수적 명당 논리에 의해 읍치의 터를 잡았기에 가장 중요한 권위의 공간인 동헌(東軒)이 북리 아래 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 동헌을 중심으로 『주례 고공기(周禮考工記)』의 공간 배치 원리, 즉 '좌종묘(左宗廟) 우사직(右社稷)'의 원칙이 무주 읍치의 공간 배치의 원리로 적용되었다. 임금이 남쪽을 향해서 바라보는 방향을 중심으로 동헌의 좌측에 무주 향교가, 우측에 사단(社壇)[사직단을 일컬음]이 위치하고 있다. 그 밖에 아사, 객사 등 관아 건물이 그려져 있다. 향교는 무주군 무주읍 읍내리 264-1번지에 지금도 남아 있다.
모든 읍치에 공통적으로 있어야 했던 객사, 향교, 사직단, 여단 등의 제사처가 무주 읍치에도 분포되어 있었다. 객사는 지방관인 고을의 수령이 최고 통치자로서의 권위를 임금으로부터 부여받았음을 나타냄과 동시에 수령이 임금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공간이었기에 규모가 가장 컸다. 사직단과 여단은 태종[1401~1418 재위] 때 명나라의 『홍무 예제(洪武禮制)』를 본따서 전국의 모든 고을에 일률적으로 설치하여 지방관의 주관 아래 제사를 지내도록 한 시설이었다. 일부 지역의 예외를 제외하면 사직단은 읍치의 서쪽에, 여단은 읍치의 북쪽에 만들도록 정하였다. 다만 고을의 사정에 따라 이들의 구체적인 위치는 조금씩 달랐다. 한편 다른 고지도에 공통적으로 보이는 제사처 가운데 성황사(城隍祀)가 없는 것이 예외적이라고 할 수 있다. 『여지도서』 단묘(壇廟) 조에 "성황사, 관아의 남쪽 3리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성황사는 실수로 빠진 것으로 보인다.
지도의 부기(附記)에는 건치 연혁(建治沿革), 군명(郡名), 형승(形勝) 등을 기록하고 있다. 먼저 건치 연혁은 『여지도서』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무풍현은 본래 신라의 무산현으로, 경덕왕 때 무풍으로 이름을 바꾸고 개령군의 속현으로 삼았다. 고려 초에는 진례현에 소속시켰다가, 명종 2년에 감무를 두었다. 주계현은 본래 백제의 적천현이다. 신라 때 단천현으로 이름을 고쳐 진례군으로 소속시켰다. 고려 때에는 주계로 이름을 바꾸고 그대로 진례군에 소속시켰으며, 명종 6년에 무풍 감무가 와서 겸임하였다. 공양왕 3년에 주계현을 무풍현에 병합하였다. 조선 태종 대왕 14년에 두 현의 이름을 따서 무주로 이름을 바꾸고 현감을 두었으며, 주계에 관아를 두었다. 현종 대왕 15년에 금산의 안성면과 횡천면을 떼어 무주에 소속시키고, 무주현을 도호부 겸 수성장으로 승격시켰다. 숙종 때인 계미년에는 토포사를 겸하도록 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또한 형승은 무산, 무풍, 주계, 적천, 단천 등으로 기록하였다.
[특징]
『1872년 군현 지도』 「무주부」 에는 무주 적산산성이 무주 읍치보다 더 크게 그려져 있다. 당시 지도 제작자들에게 사고를 보관하던 무주 적산산성의 의미가 남달랐기 때문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이후 대도시에 보관하던 사고가 전주 사고를 제외하고 모두 불에 타버리자 묘향산 등 깊은 산속에 사고를 마련하였다. 전라도에는 전주와 더불어 무주 적산산성에 추가로 사고를 설치함으로써 그 위상이 부각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지도서』에 의하면, 무주 적산산성 소속 별감을 비롯하여 소속 군인들 55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와 함께 호국사와 상원사(上元寺), 중원사(中元寺) 등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1872년 군현 지도』「무주부」에는 호국사만 그려져 있다. 적상산성에 오르는 길은 동문, 서문, 남문, 북문 등 4군데가 표시되어 있다. 이와 함께 각 성문 아래에 동창, 서창, 남창, 북창 등 4군데의 사창(社倉)[국가 기관의 창고]이 표시되어 있어 일종의 산성촌 또는 사하촌(寺下村)으로 확인되는데, 이 마을들은 기능은 없어진 채 지금도 일부만 남아 있다.
[의의와 평가]
1872년에 전국의 군현을 대상으로 지리 정보를 집대성한 고지도 가운데 하나가 『1872년 군현 지도』「무주부」이다. 행정 경관, 제사 경관, 인문 경관, 자연 경관 등을 중심으로 풍수지리적 관점과 『주례 고공기』의 공간 배치 원리가 동시에 적용되었기에 당시의 지리적 관점을 살펴볼 수 있는 지도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