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4033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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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斷髮令 |
영어의미역 | Topknot Prohibition Decree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남도 진주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백태남 |
성격 | 명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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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시작)연도/일시 | 1895년 11월 |
관련인물/단체 | 노응규 |
[정의]
1895년(고종 32) 11월 김홍집(金弘集) 내각이 성년남자의 상투를 자르게 한 명령.
[역사적배경]
1895년 8월 20일 을미사변을 일으켜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하는 국제적 범죄를 자행한 일본에 대한 저항의식이 고조되고 있을 때 일본의 지원으로 들어선 김홍집 내각이 11월 15일 고종의 조칙으로 단발령을 실시한다고 선포하였다.
[발단]
당시 내세운 단발의 이유는 “위생에 이롭고 작업에 편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지만, 유교윤리가 뿌리내려 있던 조선 사회에서 일반 백성들이 머리를 자른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요, 더구나 이것이 일본의 강압에 의한 것임이 드러나자 전국적으로 극심한 반발에 부닥치게 되었다.
[경과]
이 같은 단발령에 대한 저항은 진주에서도 일어났는데, 의병장 노응규(盧應奎)[1861~1907]가 앞장서고 다수의 진주 백성들이 참여하여 그 저항의 정도가 어느 지방보다도 강하였다. 당시 서울에서 단발령을 집행하고 감독하기 위해서 파견된 관리가 진주목 관아의 관리와 경상우병영 군대까지 동원하여 백성들의 상투를 사정없이 자르자, 분노한 백성들이 노응규의 지휘 하에 진주성을 공격하여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그 후 진주 사람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5만여 명의 의병이 조직되어 기세를 올렸다.
[결과]
노응규 의병대는 이후 부산을 공격하던 중 김해지방에서 일본군에게 패하여 흩어졌고, 단발령은 잠시 시행을 늦추다가 1902년에 와서 다시 강행되었다.
[의의와 평가]
단발령에 대한 진주 백성들의 항거운동은 전통적으로 불의에 대한 강한 의분과 일제 침략자에 대한 뿌리 깊은 저항의식으로 어느 지방보다도 강렬했고 적극적인 의병운동으로 발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