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4027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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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千鎰 |
영어음역 | Kim Cheonil |
이칭/별칭 | 사중(士重),건재(健齋),극념당(克念堂),문열(文烈)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남도 진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수덕 |
[정의]
조선 중기의 문신·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가계]
본관은 언양(彦陽). 자는 사중(士重), 호는 건재(健齋)·극념당(克念堂). 아버지는 진사 김언침(金彦琛)이다.
[생애]
1573년(선조 6) 은일지사(隱逸之士)로 천거 받아 군기시주부가 되고, 그 뒤 용안현감과 강원도, 경상도의 도사를 지냈다. 사헌부지평의 자격으로 정치의 폐단을 논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임실현감으로 좌천되었다. 그 뒤 담양부사, 한성부서윤, 수원부사 등을 두루 지냈다.
[활동사항]
1592년 임진왜란 때 서울이 일본군에게 함락되고 국왕이 피난했다는 소식을 듣고, 고경명(高敬命), 박광옥(朴光玉), 최경회(崔慶會) 등에게 의병을 일으킬 것을 촉구하는 글을 보냈다. 이어 호남에서 가장 이른 1592년 5월 6일 나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6월 3일 서울 수복을 목표로 북으로 향했다. 수원의 독성산성(禿城山城)에서 유격활동을 하다가, 8월에 전라병사 최원(崔遠)의 관군과 함께 강화도로 거점을 옮기고, 강화부사·전라병사와 협력하여 연안에 방책(防柵)을 쌓고 병선을 수리하는 등 전투를 준비했다. 이 무렵 장례원판결사의 벼슬과 창의사(倡義使)라는 군호(軍號)를 받았다. 그 뒤 조정과 호남, 호서를 연결하는 전략상 요지인 강화도를 중심으로 양화도전투, 선유봉(仙遊峰) 및 사현(沙峴)전투, 행주산성전투 등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다. 1593년 명과 일본 간에 강화가 제기되었을 때 이를 반대했다. 그해 6월 2차 진주성전투에서 관군·의병의 지휘관인 도절제(都節制)가 되었다. 경상우병사 최경회(崔慶會), 충청병사 황진(黃進) 등과 함께 항전했으나, 10만에 달하는 적군의 공세로 성이 함락되자 아들 김상건(金象乾)과 함께 남강에 투신 자결했다.
[학문과 사상]
이항(李恒)의 문인으로 경전(經典)을 몸소 실천하고 특히 거경궁리(居敬窮理)에 힘썼다. 또한 인재의 육성이 치도(治道)의 근본이 되며, 선비의 풍습을 바로잡고 수령을 잘 임명해야 한다는 등 당시 폐단을 개혁하는 방안을 건의했다.
[저술]
『건재유집』이 있다.
[상훈과 추모]
1603년(선조 36) 좌찬성에 추증되고, 1618년(광해군 10) 영의정이 더해졌다. 경상남도 진주 창렬사(彰烈祠), 전라북도 순창 화산서원(花山書院), 전라남도 태인 남고서원(南皐書院), 전라북도 임실 학정서원(鶴亭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