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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402673
한자 天主敎
영어음역 Cheonjugyo
영어의미역 Roman Catholicism
분야 종교/기독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진주시
집필자 편세영

[정의]

사도(使徒) 베드로의 후계자로서의 교황을 세계교회의 최고 지도자로 받들고 그 통솔 밑에 있는 그리스도교의 교파.

[개설]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소개된 것은 18세기 말엽이다. 당시 중국을 왕래하던 조선 사신들을 통해 시작된 중국의 선교사들과의 접촉으로 이루어졌다. 천주교의 정착은 직접적인 선교를 통해서가 아니라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를 통해 간접적으로 이루어졌다. 이 책들은 실학운동에도 자극을 주었고 서학(西學)이라는 새로운 학풍을 일으켰다. 초기에는 사회개혁에 관심이 많은 실학자, 양반학자들을 중심으로 확산되다가 점점 더 그 범위가 넓어져 갔다.

천주교의 교세가 확장되면서 정부와 유학자들로부터 탄압과 박해를 받게 되었다. 최초의 큰 박해는 1791년 전라도에서 일어난 진산사건(珍山事件)이다. 이 때 양반 천주교인 2명이 조상제사를 거부함으로서 사형을 선고받는다. 이때부터 천주교가 정치에 이용되었다.

간헐적으로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일어났지만 전국적인 규모는 아니었다. 하지만 1830년대 선교사를 맞이하게 된 천주교 교세가 들불처럼 번져갔다. 1839년에 정부에서 천주교 신자를 또 다시 박해한 기해박해(己亥迫害)가 일어났다. 흥선대원군 집권기까지 박해는 계속되었고 문호개방과 개화정책에 따라 박해가 수그러들었고 조선과 프랑스와의 한불조약(1886)은 조선에서 활동하는 프랑스 선교사들을 완전히 박해에서 벗어나게 하였다.

이 조약 이후부터 천주교는 본당(本堂)의 조직을 서둘러 원산, 제물포, 서울, 동래 등 개항지부터 시작되었다. 본당 외에도 그 본당에 소속되는 공소(公所) 조직도 계속 확대되어 결국 교구의 증설이 필요하게 되었다. 대구교구가 1911년에 처음으로 조선교구에서 독립하였고 그 때까지 한국의 유일한 교구였던 조선교구는 서울교구로 개칭되었다.

신자수가 지속적으로 증가하였지만 일제강점기 때 크게 둔화되었다. 하지만 평신도나 한국인 성직자들 가운데 국권을 수호하고 독립을 쟁취하려는 민족적인 운동에 투신한 사람들도 많았다.

해방과 더불어 완전한 종교자유가 보장됨으로써 천주교는 다른 종교와 더불어 교세를 마음껏 확장시킬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하였고 민족적인 건국사업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하지만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북한의 교회가 점점 축소되어 갔다.

1970년대부터 천주교가 한국 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비교적 높아졌다. 이유는 천주교가 사회개혁에 관심을 갖는 종교로 부각되면서 국민들로부터 큰 신뢰와 공감을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

1980년대 천주교의 활동이 더욱 더 주목받게 되었다. 1981년 조선교구 설립 150주년 기념으로 천주교 최초로 대규모 신앙대회를 개최하였다. 또한 1984년 한국에 천주교회가 세워진지 200주년이 되는 해에 많은 행사가 있었고 교황 요한바오로 2세가 직접 한국을 방문하여 한국국민과 한국교회를 축복해 주었고 한국의 순교자 103명을 성인품(聖人品)에 올리는 시성식(諡聖式)을 세계교회 사상 처음으로 현지에서 거행함으로써 한국 천주교의 성장을 세계만방에 알리는 기회가 되었다. 그러한 발전으로 말미암아 1989년 제44차 세계성체대회가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개최되었다.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라는 주제로 열린 이 대회는 세계의 불화와 대립이 분단으로 상징되는 한반도에서 열었다는 그 자체도 매우 의미 있는 것이었고 교황이 그 당시 공산국가 폴란드 출신이라는 점 역시 그 의미를 더욱 더해 주었다.

대회는 성공적으로 이루어졌고 한국 교회의 위상이 더욱 더 높아질 수 있었으며 국내에서도 많은 활동이 활발히 전개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변천]

1827년 2월 전라남도 곡성에서 시작된 정해박해는 호남지방의 천주교를 황폐화시켰다. 호남 신자들은 전라도를 떠나 경상남도 서부 지방으로 넘어 갔다.

또한 정해박해 이전부터 안동 김씨의 막강한 정치 세력을 형성하여 실권과 이득을 챙긴 결과 경제가 피폐(疲弊)되고 민생은 도탄(塗炭)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도둑이 성행하고 흉년이 들면 예사로 굶어 죽게 되었다. 자연히 떠돌아다니는 사람도 많아졌고 교우들도 남쪽으로 피난을 하게 되었다.

1860년경에는 전국에 153개의 교우촌이 있었고 그 중에서 서부 경남에는 8개의 교우촌이 있었는데 거제, 남해, 통영, 고성, 사천, 진주, 칠원, 의령 등에 있었다. 그 중 문산공소는 서부경남 지역에서 최초의 천주교회로서 창설되었고(1888), 1905년에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이때부터 문산본당은 진주, 사천, 삼천포, 고성, 통영, 거제, 함안, 의령, 합천, 산청, 하동, 남해, 전남 순천까지 포교 지역으로 다스려 미사와 성사를 집행하는 공소가 97개소까지 되었다.

1861년 리델(Felixclair Ridel) 신부가 입국하여 최양업 신부 후임으로 경상도 지방 포교를 담당하였고, 1869년에 제 6대 조선 교구장으로 임명되기에 이르며 리델 신부는 이 지방의 교우촌을 알 수 있는 지도를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교우촌도 병인박해(1866년), 무진박해(1868년) 때에 거의 사라지게 된다. 대원군이 죽고 한·불 수호조약이 체결된 이후, 경상도 지방에 다시 로베르(Achilloe Rovert) 신부에 의해 포교 활동이 시작되는데 그는 1877년 24살의 젊은 나이로 조선에 입국하여 산간벽지로 숨어 다니며 헌신적으로 포교 활동을 한다. 그는 1886년 왜관 산나무골에 부임하여 경상도의 여러 공소를 관장하기도 하고 특히 1887년에는 거제도의 옥포공소까지 가서 순교자 윤봉문의 처가 식구에게 세례성사를 베풀기도 하였다.

경상남도 지역의 공소가 광활해지자 새로운 본당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는데 처음 본당을 세우고자 했던 곳이 진주였다. 진주는 1895년 진주부 승격 이후 관찰사가 거주하는 경상남도의 중심 도시였다. 따라서 신자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진주에 신부를 모시고자 원하였고, 1897년 11월경에는 집 한 채를 마련하여 이를 주교께 보고하였다. 그래서 신자들은 1898년 사제 피정 뒤에 새 신부가 부임될 것이라고 믿었으나 오시지 않자 진주지역 신자들은 1898년 7월 21일자로 주교님께 탄원서를 내어 신부 한 분을 보내 주길 빌며 신부 영입 운동을 펼쳤는데 장재, 문산, 삼가, 원당, 곤양 공소 등이 중심이었다. 이를 알게 된 부산본당의 타께(Emile Taquet) 신부는 진주본당의 신설을 역설하면서 자신이 진주에 갈 것을 자원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1899년 6월 성신강림축일 전날에 교우들의 환영을 받으며 진주에 부임한 타께 신부는 교우들이 장만한 집 이웃에 또 다른 집을 매입하여 옛 집은 성당으로, 새 집은 사제관으로 개조하여 거주하게 된다. 그러나 진주에서도 타께 신부는 1년밖에 머물지 못했는데 그동안 여러 사건을 겪었다. 우선 그가 부임하자 교우들과 주민들은 매우 환영하였다. 특히 주민들은 서양인이 오니까 관의 횡포를 막아줄 것이란 기대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지방의 망나니들과 아전들은 노골적으로 반대하며 신부를 괴롭혔다. 타께 신부가 뮈텔 주교에게 보낸 1899년 7월 28일자 편지에 의하면 아전들이 범죄자를 잡는다는 구실로 사제관을 침입하여 난동을 부린 사건도 있었고 신부를 도와 복사일을 보던 김윤중이라는 사람이 부랑배와 합세하여 사기를 치다가 관헌에 잡혀 교회의 체면을 깎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여하튼 진주에서 1년을 보낸 타께 신부는 본당을 옮겨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다음과 같은 이유를 주교에게 아뢰었다. ‘진주본당 신자의 대부분은 공소 신자였지 자체 신자는 별로 없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마찬가지다. 더구나 김윤중 사건으로 교회는 신망을 잃었고 회복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또 진주성당은 술집과 접대부와 아전들만이 사는 나쁜 거리에 있었다. 그런데다 건물이 낡아 위험한데 수리하려면 2백 원이라는 엄청난 돈이 든다.’ 이런 여러 이유를 합하여 타께 신부는 본당 이전을 결심하고 후보지 물색에 나섰다. 처음에는 소촌공소(지금의 문산본당)를 생각했지만 결국 마산으로 본당을 옮기게 된다. 부임한 지 1년 만에 여러 사정으로 마산으로 본당을 옮기게 되고 진주는 다시 공소로 남게 되었다가 1925년에 가서야 본당으로 승격하게 된다.

[현황]

2006년 현재 진주에는 망경성당, 문산성당, 봉곡성당, 상평동 성당, 신안성당, 옥봉성당, 장재성당, 칠암성당, 하대성당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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