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6014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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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自升車 |
이칭/별칭 | 자승거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물품·도구/물품·도구 |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권호 |
[정의]
화순 출신 조선 후기 실학자 하백원이 발명한 우리나라 최초의 자동 양수기.
[개설]
화순 지역 출신의 조선 후기 실학자 규남 하백원이 30세 되던 1810년에 발명한 자동 기계 장치다. 물을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는 데 사용하는 것으로, 오늘날의 양수기에 해당한다. 하백원의 『자승차 도해』에 설계도 등이 남아 있던 것을 바탕으로 국립 중앙 과학관 과학 기술사 팀에서 2년에 걸친 연구 끝에 2005년 복원에 성공했다. 자승차는 가뭄에 시달리던 농촌에 큰 도움을 주기 위해 발명한 것으로 조선 세종 대에 발명한 자격루(自擊漏) 이후 시도된 자동화 기기라는 점에서 매우 의의가 크다. 즉 당시 과학 기술 원리에 대한 이해도를 파악하고 실학자들이 보여주었던 현실 문제 해결과 같은 실천 지향적 태도를 잘 보여준다.
[연원 및 변천]
수차(水車)는 가뭄에 대비해 농촌에서 사용하는 일종의 양수기로 풍차(風車)와 더불어 증기 기관이 발명되기 이전에 있었던 가장 중요한 동력 장치였다. 근대에 이르는 모든 기계 장치들 중에서 시계 장치를 제외하고는 가장 정밀한 기계였다. 수차는 용도에 따라 정곡(精穀)과 제분(製粉)용 물레방아의 동력으로, 그리고 관개 수리(灌漑水利)용의 물레바퀴로 이름을 각각 다르게 불렀다.
우리나라에서 수차를 이용한 기록은 『고려사』에서 1362년(공민왕 11)에 처음 찾아볼 수 있지만 일반화되어 사용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 시대부터는 사람이 발로 밟아 돌리는 물레바퀴인 답차(踏車)[무자위라 부르기도 함]가 가장 많이 보급됐는데, 거의 구조 변화 없이 광복 전까지도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었다. 염전(鹽田)에서는 지금까지도 쓰이기도 한다.
‘자승차’는 사람이나 가축의 힘에 의존하지 않고 오로지 수력으로만 물을 댈 수 있는 자동 양수기다. 자승차 작동 원리의 핵심은 강물의 유속(流速)을 이용해 프로펠러를 돌리고, 이 프로펠러의 회전력으로 수저(水杵)[물 부채]를 들어 올림으로써 물을 퍼 올리는 것이었다. 이 방식은 당시 수차 기술이 발달했던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매우 획기적인 발명이었다. 작동 원리나 구조, 동력 전달 방식 등에 근대적 과학 기술의 원리가 적용됐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과학 기술사의 새 장을 열기에 충분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하백원은 이와 같은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 자승차 제작에 필요한 설계도를 무려 15점이나 실었다. 그만큼 수차를 농사의 중요한 수단으로 인식했다고 할 수 있다.
하백원은 수차의 역사를 검토하면서 서양의 수차가 매우 정교하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에 가장 정교하다는 서양의 3대 수차에서도 문제점을 찾아냈다. 그랬던 만큼 수차를 연구하던 하백원이 조선의 여건을 돌아보게 된 것은 당연했다. 조선에는 이들에 필적하는 수차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하백원은 “우리나라에서 이용하는 수리 기구는 너무나 졸렬하여 사람이나 가축의 힘에 의존해야 하므로 쉽게 지쳐 그만둔다. 이 때문에 비옥한 농지라도 지세가 조금만 높으면 열흘만 가물어도 걱정이니 식량을 마련하기 어렵다는 것은 괴이한 일이 아니다.”며 안타까운 심정을 드러냈다. 결국 하백원은 기존 수차들의 단점을 극복하고 조선의 수리 문화를 개선하고자 자승차를 개발했던 것이다.
[형태]
자승차는 가로대나 굴대[軸]를 쓰지 않고, 인력을 빌리지 않으면서도 많은 양의 물을 높은 곳까지 끌어올릴 수 있도록 고안됐다. 일종의 영구 기관에 가까운 이런 성능을 가진 수차는 당시 어디에도 없었다. 자승차는 크게 실린더 역할을 하는 방통(方筒)과 동력 전달 장치인 수륜(水輪), 그리고 두 부분을 안치하는 받침대[架]의 세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자승차의 작동 원리는 다음과 같다. 누운 홈통으로 흘러 들어온 물이 물 부채에 부딪히면, 물 부채와 함께 결합되어 있는 굴대와 쌍륜이 동시에 회전한다. 쌍륜이 회전함에 따라 물공이에 설치된 이빨과 쌍륜의 이빨이 맞물려 돌고, 이때 한쪽의 물공이가 올라가면 다른 쪽의 물공이는 내려간다. 물공이가 올라가면 물공이가 직선 상하 운동을 하도록 유도하는 전쌍통의 한 쪽 통에 물이 흡입된다. 물공이가 내려가는 통에서는 후통과의 칸막이에 설치된 혀를 통해 통 속에 이미 가득 들어온 물이 후통으로 밀려간다. 혀[밸브]는 심장의 판막처럼 들어온 물이 들어온 곳으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돼 있다. 이 공정이 반복되면 후통에도 물이 가득 차서 물공이가 내려올 때마다 승통을 통해 위로 올라가게 된다. 이런 일련의 과정이 물의 힘으로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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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자승차에는 결정적인 약점이 있었다. 먼저 물공이의 상승 운동은 쌍륜에 의해서 가능하지만 하강 운동은 외부의 힘 전달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후통으로 물을 밀어낼 만큼 강력하게 하강 운동하기 위해서는 오로지 물공이의 무게에만 의존해야 한다. 이 때문에 하백원은 박달나무나 회화나무 같은 무거운 나무로 이를 만들라고 특별히 주문했지만, 이 나무의 비중으로도 물을 올릴 수는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약점은 모래나 흙이 전통이나 후통에 쌓이면 작동이 안 된다는 점이다. 전통에 쌓이면 혀가 열리지 않기 때문에 물이 더 이상 들어오지 않고, 후통에 쌓여도 역시 혀가 작동하지 않아 물이 이동하지 않는다. 이는 혀가 물뿐만 아니라 모래나 흙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다. 이런 문제를 극복하려면 불순물이 없는 물을 지속적으로 공급해야 한다. 이 때문에 자승차는 책으로만 전해지는 수차에 머물렀다. 하백원이 중도에 왜 지속적인 연구를 하지 못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자승차도 해설』의 말미에 “도해에서 다 하지 못한 것은 재주 있는 사람이 기술해 주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한다. 이를 통해 추론해 보면, 아마도 장인(匠人)이 아닌 선비로서 당시에는 매우 생소했던 전문 기술 지식에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비록 실제로 사용되지는 못했지만 자승차는 과학 기술에 대한 상당한 지식과 당시 농민들에 대한 하백원의 관심과 애착이 묻어있는 발명품이다. 우선 다양한 과학 원리를 활용해 높은 수준의 과학 기술을 선보였다. 유체 역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있었다는 점과 강물의 흐름을 활용해 수차를 회전시키는 것은 터빈을 이용해 에너지를 얻는 수력 발전 원리와 연결되는데, 이렇게 얻은 동력을 전달하는 장치에 대한 기술은 자동차 공학에도 적용할 수 있는 원리였다. 즉 강물의 직선 운동을 회전 운동으로 바꾸고, 이 회전 운동을 다시 직선 운동으로 변환시키는 물레방아의 원리를 활용한 것이었다. 또한 동력 전달 장치인 프로펠러축에 달린 쌍륜은 캠의 원리를 활용한 것으로 자동차 엔진의 밸브 장치에 응용되는 첨단 아이디어이며, 오늘날 자동차 공학에서 핵심적으로 사용하는 분야이다.
[생활 민속적 관련 사항]
자승차는 하백원이 발명한 것으로 도해 상으로는 남아 있지만 실제로 제작해 사용하지는 못했다. 2005년 대전 중앙 과학관 복원팀이 재현한 자승차의 모형이 규남 하백원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