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2007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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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姜大成 |
영어공식명칭 | Gang Daeseong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함안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장혜금 |
[정의]
일제 강점기 함안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광주 학생 운동은 서울로 이어져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1929년 12월 2일 밤과 3일 새벽에 경성 제국 대학을 비롯한 주요 공립·사립 학교와 시내 요소에 광주 학생 운동의 전국화를 위해 학생과 민중의 총궐기를 촉구하는 격문이 살포되었다. 강대성은 당시 서울에서 광주 학생 운동의 동맹 휴교를 주도하였다.
[활동 사항]
강대성(姜大成)[1910~1956]은 1910년 5월 10일 함안에서 태어났다. 1929년 중앙 고등 보통학교 4학년으로 같은 학교 학생인 심홍택(沈弘澤)·강상덕(姜相德)·황한희 등과 함께 학무 국장과 교장에게 제출하기 위한 진정서 2통을 작성하였다. 진정서는 김순희(金淳熙)조선 학생 전위 동맹(朝鮮學生前衛同盟)의 중앙 집행 위원 겸 선전 부장이 제시한 것으로, '광주 학생 사건에 관련하여 검거된 자를 석방하고, 언론·집회·출판의 자유를 부여하라'는 내용이었다. 최진한(崔鎭漢)이 1929년 12월 9일 교장에게 제출하였고, 강대성은 진정서를 필사(筆寫)하여 학생들에게 낭독하였다. 강대성은 학생들을 운동장에 모아 '광주 학생 만세'라고 외치고 '우리는 광주 생도에 동정하여 석방을 요구하기 위해 동맹 휴교를 단행하자'고 연설하였다. 강대성은 이 일로 검거되어 1930년 12월 19일 경성 지방 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개월에 집행 유예 4년 형을 선고 받았다.
이후 일본의 조도전 대학[와세다 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1936년 6월 25일 일본도쿄 간다구[神田區]에서 각 학교 조선인 학생의 연락 기관으로 조선 유학생 연구회를 결성하였다. 메이지 대학[明治大學]박용칠(朴容七)·우삼흥(禹三興), 니폰 대학[日本大學]장재성(張載性) 등 약 30여 명이 함께하였다. 강대성은 2월 1일 임시 총회에서 조사부 위원으로 선출되어 강연회를 열고, 조선인 학생을 대상으로 민족의식을 높이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1938년 5월 19일 우삼흥이 검거되고, 이어서 강대성도 검거되었다. 강대성은 이 일로 1939년 12월 11일 대구 지방 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기소 유예 처분을 받았다.
[상훈과 추모]
2003년 건국 포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