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200294
한자 獨立運動
영어공식명칭 Independence Movement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함안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양미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독립운동 - 경상남도 함안군

[정의]

일제의 식민 지배의 모순을 타파하고 조선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함안 지역의 실천 활동.

[개설]

1900년대 근대적 학교와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함안의 독립운동은 1919년 3월 9일 칠북면 이령리연개 장터 만세 운동을 시작으로 청년 운동, 신간회 운동, 협동조합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역사적 배경]

함안 지역은 1894년 민란을 통하여 개항 체제 아래서 빚어지고 있던 봉건적 모순과 새로운 모순에 항거하여 함안 지역민의 역량을 드러내었다. 또한 함안은 토지 조사 사업 이후, 일본인의 대농장인 남해 척식 주식회사 함안 농장까지 들어서면서 일본의 침략은 더욱 노골화되었다. 그리고 이후 이러한 모순이 제거되지 않자, 활빈당의 활동으로 그 역량을 이어 갔다. 비록 의병이 함안 지역을 중심으로 결성된 것은 없었으나, 경상남도 주변 지역에서의 의병 활동이 함안 지역민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함안 지역 3.1 운동의 특징]

유풍(儒風)이 강한 함안 지역에도 1900년대 근대 학교가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근대 학교는 민족의식을 고취하였으며, 특히 민중을 교육 대상으로 하였기 때문에 이후 3·1 운동의 대중적 지지 기반을 마련하는 데 큰 구실을 하였다. 함안 지역의 최초의 근대 학교라 할 수 있는 경명 학교가 1904년 설립되었다. 경명 학교는 교회에서 설립하여 운영된 학교로, 이후 칠북면 이령리연개 장터 만세 운동에서 이령 교회와 함께 중심적인 일을 담당하였다.

한편, 서원과 서당을 통하여 유림이 세력을 계속해서 결집하였는데, 이 또한 함안 지역에서 유림 세력의 활약이 두드러지는 원인이기도 하다. 함안 지역 3·1 운동의 또 다른 특징은 바로 기독교 세력이 주축이 되었다는 점이다. 1897년 이령 교회가 설립되었고, 그리고 그 주변 지역에도 마을 교회들이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 교회 창건과 기독교도의 증가 역시 지역 운동의 활성화를 가져다 준 주요한 요인이 되었다.

우선 함안 지역의 3·1 운동, 특히 3월 9일 칠북면 이령리연개 장터 만세 운동은 경상남도 최초의 만세 운동이라는 점에서 함안 지역의 독립운동의 의미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함안 지역에서 전개된 3·1 운동은 기본적으로 경상남도 지역에서 일어난 3·1 운동과 궤를 같이하지만, 함안 지역만이 가지는 차별성이 존재한다. 경상남도의 경우 학생과 종교계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1919년 3월 3일 독립 선언서가 배포되고 서울의 시위 소식이 전해지면서 준비하기 시작한 반면, 함안의 경우에는 함안 지역 인사들이 고종의 장례식에 참가하고 귀향한 뒤부터 독립운동이 시작되었다.

함안 지역의 독립운동의 또 하나의 큰 특징은 치밀한 계획 하에서 함안 지역 내에서 연속적으로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3월 9일 칠북면 이령리연개 장터 만세 운동을 시작으로 4월 13일 칠원면구성리 시장 만세 운동으로 종결될 때까지 모두 11회의 만세 운동이 6개 면에서 1만 2000여 명이 넘는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참여하였다. 주요 참가자들은 유림 세력에서부터 기독교인들, 연령대는 10대부터 70대, 동명 학교 같은 근대 학교 교사에서부터 한문 교사와 학생, 소작인에서 면장 자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의 인사들이 참여한 전 군민적 만세 운동이었다.

[1920년대 이후 함안 지역 독립운동의 특징]

함안 지역의 3·1 운동은 저항적 운동의 역량을 1920년대 이후 다양한 민족 해방 운동으로 이어지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는 농민 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던 청년 운동, 신간회 운동, 협동조합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함안 지역의 민족 운동과 사회 운동은 1920년대 중반 이후부터 운동의 중심이 함안 읍내보다 군북 지역으로 이동하는 양상을 보인다. 이는 1931년 4월 함안 청년 동맹에서 동맹 회관을 군북으로 이전하려고 한 데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이런 움직임은 1920년대 후반이 되면서 군북, 법수 지역을 중심으로 수리 조합과 관개 시설이 대거 확충되면서 이 지역에서 농민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던 것과 관련이 있다. 1920년대 후반 청년 동맹과 함안 농민 조합에서 성장한 새로운 청년층은 광복 이후 자주적 민족 국가 수립 운동과 관련하여 중요한 일을 담당하였다. 이 점에서 일제 강점기 함안 지역 민족 해방 운동의 의의와 연속성을 발견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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