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9C0302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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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상북도 고령군 우곡면 도진리 |
집필자 | 박경용 |
[56년을 함께해 온 장수 부부]
박준열·정경순 씨 부부는 도진리에서 결혼 후 50년 이상을 함께 해로하는 장수 부부에 속한다. 박준열 씨는 일제 강점기던 1925년 도진마을에서 2남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나 평생 한 마을에서만 살아온 토박이다. 정경순 씨는 1936년 인근의 합가2리[한적골]에서 태어나, 20세 때 결혼해 도진마을로 들어왔다. 2010년 올해는 이들이 결혼한 지 56년째가 되는 해이다.
박준열 씨가 청년 시절 씨름하다 다친 다리 때문에 고생한 것 외에는 노부부는 지금까지 크게 앓아 본 적이 없다. 이렇게 건강하게 장수하는 비결을 묻자 박준열 씨는 “공기 좋은 데 살고, 맘 편하게 살기 때문이지요. 자식들도 속 안 썩이고…….”라고 답한다.
항시 미소를 잃지 않고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생활 태도와 화목한 부부 관계도 장수 요인 중의 하나인 듯 보였는데, 정경순 씨는 “성격이 무던하고 점잖다.”고 남편을 평하고, 박준열 씨도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절대 짜증을 안 낸다.”면서 아내를 칭찬해 주었다.
[하루 세끼 밥 얻어먹기도 힘들었어]
이들 장수 부부는 모두 젊은 시절 일제 치하에서 어려운 생활을 경험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농본(農本) 사회로서 모든 식구들이 한 집에서 살았다. 식구들도 많아 집집마다 보통 열 명이 넘었다. 결혼 당시 박준열 씨의 집에도 조카들이 열한 명이나 태어나 열네 명이 사는 대가족이었다.
“결혼해도 집이 없어 모두 한 집에서 같이 살았어요. 식구들이 버글버글했지요. 밥도 서 말딕이[세 말 규모] 솥에 가득 해야 한 숟가락씩 갈라 먹지요. 밥 외는 먹을 것도 없어 그릇에 수북이 담아 먹고요. 그렇게 먹어도 배가 고파 못 견뎠어요.” 박준열 씨의 말처럼, 당시에는 하루 세끼 밥 얻어먹기도 힘들었다. 정경순 씨는 “돌아서면 밥 지어야 하고, 참…… 어떻게 그 많은 식구들을 돌봤는지 모르겠어요.”라면서 당시 살림살이의 팍팍함을 회고한다.
도진마을은 일제 강점기부터 우곡면의 면소재지였다. 일본인이 주임으로 있던 고령경찰서 우곡지서도 있었고, 1944년에는 도진국민학교도 문을 열었다.
그는 집안의 경제 사정으로 초등 교육조차 받을 수 없었다. “월사금 그거지 뭐 큰돈은 안 들었는데, 그래도 묵고 살기가 워낙 어려워 웬만해서는 학교 안 보냈어요. 우리 또래 되는 사람들은 거의 못 다녔어요.”라는 박준열 씨의 말은 열악했던 당시의 교육 환경을 말해 준다.
대동아전쟁 무렵 제2기 훈련 소집령이 나왔지만, 박준열 씨는 다리가 좋지 않아 다행히 전장으로 내몰리지 않았다. 당시 또래 친구들은 월오동의 초등학교[현 월오중학교]에서 군사 훈련을 받은 후 일부는 중국이나 일본, 북해도 등지로 징용 가서 돌아오지 못했다.
일제 강점기 도진리에서는 주로 보리, 나락, 밀, 명[목화] 등을 생산했다. 전쟁 기간 중에는 일제의 독려로 밭에 명을 주로 심었다. “나락 다 되어 가지고 물을 담아[물에 잠겨] 농사를 망칠 때가 많았지요.”라는 말처럼, 회천 제방을 축조하기 전에는 홍수가 질 때마다 강물이 넘쳐 농사를 망쳤다. 그래서 죽으로 끼니를 때운 적도 많았다. 강물이 많이 범람할 때는 그의 집 앞까지 물이 올라왔다고.
[사람만 징병으로 몰린 게 아냐]
“내가 이 마을에서 태어나 85년을 살았으니 참 많이 살았네요.”라면서 박준열 씨는 일제 강점기 어려운 시기를 회상하였다. 당시는 물자가 딸리던 시절이라 먹을거리는 항시 부족했다. 일제는 대동아전쟁을 치르면서 징병이나 징용으로 사람만 동원한 것이 아니라 식량과 베, 명, 쇠붙이, 가마니, 관솔, 칡이나 싸리나무 껍질 등 온갖 물자까지 거두어 갔다.
“벽에다가 가마니를 붙여 놓고 앞에다가 장작을 쪼개서 재~놓아 숨겨 놓곤 했어요.”라는 박준열 씨는 말처럼, 당시 도진리 사람들은 농사지은 것을 공출로 모두 빼앗기지 않으려고 여러 가지 방법을 강구했다. 어떤 이는 보리나 나락 볏가리를 숨겨 두었다가 탄로가 나기도 했다. 일부는 회천 강변에 땅을 파고 독에다 곡식이나 명을 넣어 숨기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 일본 경찰이나 면서기들은 부녀자들이 짜고 있는 베틀 위의 베까지 잘라 갔다고 한다. 누에 먹인 고치로 실을 잣고 있는데 빼앗아 가기도 했단다. 콩 대신 명을 심도록 강요하기도 했다. 심지어는 밥해먹는 솥과 놋그릇, 숟가락까지 빼앗아 가서 나무숟가락이나 옹기그릇, 바가지를 대용했다.
일본 경찰과 면서기 등은 집 안 곳곳을 조사해서 무엇이든 눈에 띄는 것은 빼앗아 갔는데, 관솔이나 가마니도 가가호호 공출 양을 배당해 놓고 강제로 거두어 갔다. 이 때문에 박준열 씨는 14세 때부터 족작기(足作機)로 가마니를 10년 넘게 짰다. 자가 조달이 어려운 경우에는 돈을 주고서라도 구입해서 충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들 물자들은 모두 전쟁을 치르기 위한 군수용으로 쓰였다.
당시 일제는 도진리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전 농촌 사람들이 농사지은 나락, 콩, 보리, 밀을 모두 공출해 가고 대신 중국에서 들여온 콩깻묵을 배급으로 주었다. 양식이 바닥나는 봄 즈음이면 밥을 해 먹었는지, 아니면 죽을 먹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솥 검사까지 나왔다. 밥해먹은 흔적이라도 있으면 배급조차 주지 않았다. 이처럼 쌀은 구경조차 하기 어려울 정도였으므로 아이들은 항시 쌀밥 타령을 했다. 그래서 아이들이 등 위에서 울 때면 어른들은 “울지 마라 쌀밥 줄게.”라면서 달랬고, 조상 기제 때는 쌀이 없어 보리 섞은 메밥을 차려야 했다고. 박준열 씨 부부는 지금도 되돌아보는 게 끔찍할 정도로 어려운 시기였다며 당시를 어렵게 회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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