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9C0101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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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상북도 고령군 우곡면 도진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정동락 |
[도진리는 고령박씨의 이상향]
대가야읍에서 개진면을 지나 모듬내[회천] 변으로 난 지방도 67호선을 따라오면 우곡면의 도진리에 이른다.
낙동강의 지류인 모듬내[회천] 변에 자리 잡은 도진리는 특히 고령박씨[도진박씨]들이 650여 년간 터를 잡고 살아온 곳으로 유명하다.
도진리의 연원에 대해서는, 1180년경 주(朱)씨들이 처음 마을을 개척하고 주진(朱津)이라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하지만 어디에서 근거한 내용인지는 불분명하다. 이후 고려 후기인 1350년(충정왕 2)경 박경(朴景)이 마을을 개척하면서 도진리는 고령박씨 집성촌이 되었다.
박경이 처음 마을에 정착했을 때 마을 앞을 휘감아 흐르는 모듬내 변에 복숭아밭이 우거져 있어 봄이면 복숭아꽃이 만발하였다.
이 때문에 마을 이름을 도연명(陶淵明)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나오는 무릉도원(武陵桃源)과 흡사하다고 하여 도원(桃源)이라 했다고 전한다. 또 도진리에서 모듬내를 건너 야정과 속리, 대곡, 사전리 쪽으로 가는 나루터가 있다고 하여 도진(桃津)이라고도 불렀다. 이처럼 고령박씨들은 도진리를 복숭아꽃 피는 무릉도원의 ‘도(桃)’자와 모듬내를 건너는 나루터 ‘진(津)’자를 합하여 ‘도진’이라 부르며 자신들이 살고 있는 도진리를 강변의 무릉도원으로 자부하였다. 남와(南窩) 박민국(朴敏國)[1740~1817]의 「도원(桃源)」이란 시는 도진리 사람들의 이러한 인식을 잘 반영하고 있다.
십리안도차일대(十里岸桃遮一隊: 모듬내 강변 십 리에 복숭아나무 열 지어 늘어서)
요요홍자지지애(夭夭紅慈枝枝愛: 활짝 핀 붉은 복숭아꽃 가지마다 사랑스럽네)
진음원격오인거(塵音遠隔吾人居: 속세 소리 멀리한 곳에 내가 살고 있으니)
두각선원재차내(斗覺仙源在此內: 문득 깨닫고 보니 신선이 사는 무릉도원이 바로 이곳이네)
박민국이 살았던 19세기 초반까지 도진리는 마을 앞으로 흐르는 모듬내 강변 십 리에 걸쳐 늘어선 복숭아나무에 붉게 핀 꽃이 강변의 물 위에 비치는 모습이 마치 신선이 사는 무릉도원과 진배없었다.
그 후 1970년대까지 청룡산 아래에서 모듬내 강변까지 복숭아나무가 군집을 이루고, 마을 북쪽으론 강버들이 장관을 이루었다고 한다.
1970년대 이후 강변에 제방을 축조하면서 복숭아나무는 자취를 감추었지만 도진리는 지금도 고령박씨들에게 여전히 강변의 무릉도원으로 인식되고 있다.
[대장산과 모듬내가 어우러져 학이 둥지를 틀다]
도진리는 동편으로 높이 300m 내외의 산지가 북에서 남으로 뻗어 내리면서 마을의 북쪽과 동쪽, 남쪽을 감싸고 있다. 이 산지는 도진리의 남쪽으로 계속 이어지다가 낙동강에 의해 막힌다. 그리고 마을의 앞쪽인 서편으로는 북에서 남으로 모듬내가 흘러내린다. 모듬내는 가야산에서 발원한 대가천과 안림천이 고령읍내에서 합수하여, 도진리 앞을 지나 우곡면 객기리에서 낙동강과 합류한다.
도진리 마을 북쪽에는 진산인 대장산(大嶂山)이 우뚝 솟아 자리 잡고 있다. 이 산은 높이 302.5m로 그리 높지 않은 편이나, 낙동강과 모듬내 변에 위치한 관계로 실제보다 훨씬 더 높아 보인다.
대장산은 앞쪽으로 도진리와 모듬내를 내려다보고, 뒤편으로는 개진면 개포리의 개포나루를 조망할 수 있는 요충지에 해당한다. 대장산의 내룡(來龍)이 한 줄기 꿈틀거리며 내려와 모듬내 앞에서 뭉쳐진 곳에 도진리가 자리 잡고 있다.
대장산의 주맥은 도진리를 감싸고 남쪽으로 내달려 청룡산까지 이어진다. 높이 300.2m의 청룡산은 그 맥이 청룡이 꿈틀거리는 듯한 모습으로, 도진리의 안산(案山)에 해당한다. 그리고 도진리에서 모듬내 너머로 멀리 바라보이는 산이 소학산이다.
높이 489.1m인 소학산은 마치 학이 둥지를 튼 모습을 하고 있는데, 풍수지리적으로 도진리의 조산에 해당한다. 서편의 백호맥은 대장산의 산줄기가 마을 서편으로 뻗어 있고, 동편의 청룡맥은 마을의 동편을 감싼다.
한편, 대장산의 골짜기 사이로 흘러내린 몇 가닥의 물길은 마을에 식수를 공급하고 모듬내로 합류해 들어간다. 하지만 이 물길은 1970년대 복개되어 현재는 볼 수 없다.
마을 앞으로 지나는 모듬내는 완만하고 유유하게 흐르지만, 마을과 너무 가까이 있어 풍수적으로는 불리하다. 그리고 마을 남쪽에는 반달 모양의 도진들이 형성되어 있으나 그렇게 넓지 않아 도진리 주민들은 모듬내 너머 야정과 속리, 대곡, 사전 등지에서도 농사를 짓는다.
이처럼 도진리는 대장산과 청룡산, 소학산이 감싸 안고 앞으로는 모듬내가 흘러내린다.
남와(南窩) 박민국(朴敏國)의 잡록인 『불휴당문기(不休堂文記)』에는 두사충(杜思忠)[임진왜란 때 명나라의 장수로 참전했다가 조선에 귀화한 인물]이 도진리의 땅을 평해 행주형(行舟形)[배가 항해하는 형국]으로 파악했다는 부분이 나온다. 또한 “도진기형세여주 의불착정착정지 즉도진필패(桃津基形勢如舟 宜不鑿井鑿井地 則桃津必敗)[도진리 터의 형세는 마치 배와 같으므로, 우물을 파지 말아야 한다. 만약 우물을 파게 되면 도진은 반드시 망할 것이다]”라고 했다고 전한다.
[낙동강 메기가 하품만 해도 피해가 나는 곳]
도진리는 마을 앞으로 흐르는 모듬내[회천]와 인접해 있다. 이 때문에 “도진은 낙동강에 메기가 하품만 해도 물 담는 곳[물에 잠기는 곳]”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피해가 많았다. 마을 사람들은 1920년의 경신년과 1936년 병자년 홍수 때 피해가 컸다고 기억하고 있는데, 당시 마을의 주요 건물들이 대부분 침수되었다고 한다.
이를 막기 위해 1965년경 도진리 앞에 제방을 축조했지만 큰 비만 오면 마을은 수몰되었는데, 가장 최근으로는 2003년 태풍 매미 때도 제방이 넘쳤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에 따르면, 1976년 안동댐이 건설되기 전에는 비가 갠 뒤 3일 후에 마을이 물에 잠겼다고 한다. 낙동강의 역류 현상 때문이었다. 하지만 댐이 건설된 후에는 하루 뒤에 물에 잠겼다. 그러다가 1980년대에는 10시간 뒤, 1990년대 이후에는 5시간 뒤에 물이 범람했다. 낙동강 제방이 축조된 후 안동댐에서 수문을 개방하면 곧바로 영향을 받기 때문이었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이후 댐이 축조되고 낙동강 제방 공사가 이루어지면서 안동댐에서 수문을 개방하면 곧바로 영향을 받기 때문이 강변 마을인 도진리의 수해의 역사는 낙동강 범람의 역사이기도 하다. 하지만 현재는 제방이 잘 정비되어 물 걱정을 별로 안 하는 편이라고 한다.
[정보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