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9C010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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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상북도 고령군 우곡면 도진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정동락 |
[도진(桃津)은 고령박씨의 고향]
경상북도 고령군 우곡면 도진리는 고령박씨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으로, 고려 후기인 1350년(충정왕 2)경 박경(朴景)이 입향한 이후 고령박씨의 본향을 이루었다.
이후 도진리의 고령박씨 문중은 지금까지 650년간 이곳에서 세거해 오고 있는데, 이 때문에 도진리 박씨들은 다른 문파와 구분하여 자신들을 특별히 ‘도진박씨’라고도 부른다. “고령 지역의 대표적인 문중으로는 도진박씨[고령박씨]와 개실마을의 선산김씨[일선김씨], 관동의 성산이씨 등이 있습니다. 그 중 우리 집안이 가장 먼저 고령에서 터를 잡은 유서 깊은 문중이에요.”라는 도진충효관 관장 박돈헌[1948년생] 씨의 말처럼 고령박씨[도진박씨] 문중의 자부심은 다른 어떤 문중에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誌)』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토성(土姓) 조에는 고령의 토착 성씨로 ‘신(申)·박(朴)·이(李)·유(兪)·김(金)·백(白)·정(鄭)’ 등 일곱 개의 성씨가 기재되어 있다. 고령박씨도 신·이·김씨 등과 함께 고령의 대표적인 토성(土姓)의 하나였던 것이다.
토성은 지역적인 촌락 공동체의 의미를 지닌 토(土)와 혈연적 씨족 공동체인 성(姓)을 합성한 이중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토성은 신라 후기와 고려 전기에 형성되었는데, 특히 940년(태조 23) 고려 태조가 전국의 토성을 나누어 정한 것[土姓分定]에서 정착하였다. 그리고 신라 후기 이후 조선 전기까지 역대의 지배 세력은 모두 토성에서 공급되었다.
고령을 본관으로 하는 ‘박씨’는 신라 후기와 고려 전기에 형성되어 현재에 이르기까지 고령 지역의 대표적인 성씨 집단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도진리는 ‘고령박씨들의 고향’이라고 불릴 만하다.
고령박씨는 신라 왕족인 박혁거세의 후예로 신라 54대 왕인 경명왕(景明王)의 둘째 아들 고양대군(高陽大君) 박언성(朴彦成)을 시조로 한다. 그 후 세계(世系)는 불분명하나, 박섬(朴暹)을 중시조로 하는 사인공파(舍人公派), 박환(朴還)을 중시조로 하는 부창정공파(副倉正公派), 박연(朴連)을 중시조로 하는 주부공파(主簿公派) 등 세 파로 나누어졌다. 이후 사인공파에서 일곱 개, 부창정공파에서 일곱 개, 주부공파에서 한 개 등 총 열다섯 문파로 분파되었다.
고령박씨는 12세기 중엽인 고려 의종 때 무공(武功)으로 대장군이 된 박지순(朴之順) 때부터 본격적으로 사족(士族)으로 성장하였다. 이후 15세기 초에 박흥양(朴興陽)[참찬문하부사 역임], 박건순(朴健順)[박흥양의 손자, 감사 역임] 등 문과 급제자를 많이 배출하였다. 그리고 읍취헌(揖翠軒) 박은(朴誾)을 위시한 사림파에 속하면서 개경으로 진출한 인물들도 많았고, 고령에 머물면서 재지적 기반을 유지한 가문들도 많았다. 도진박씨[고령박씨] 역시 이러한 부류에 속하였다.
[재지 사족으로 자리 잡다]
도진박씨[고령박씨]는 부창정공 박환의 8세손인 소윤공(少尹公) 박경(朴景)을 입향조로 하고 있다. 박경이 사재감소윤(司宰監少尹)을 역임한 후 고려 후기인 1350년경 도진리를 개척한 후 파조를 이룸으로써 도진리는 도진박씨[고령박씨] 소윤공파(少尹公派)의 본향이 되었다.
이후 고령박씨 소윤공파는 16세기에 들어와 다시 세 개의 지파로 나뉜다. 즉, 박경의 5세손인 박계조(朴繼祖)의 큰아들 박윤(朴潤)의 죽연파(竹淵派)[또는 장파], 셋째 아들 박택(朴澤)의 낙락당파(樂樂堂派)[또는 숙파], 둘째 아들 박일(朴溢)의 양자인 박정번(朴廷璠)의 학암파(鶴巖派)[또는 중파]로 갈라진 것이다. 그리고 현재까지 이 세 지파의 후손들이 도진리에 정착하면서 선조의 유업을 이어 나가고 있다.
도진박씨[고령박씨]가 고령을 대표하는 재지 사족으로 성장한 것은 1455년 박경의 증손자 박형(朴炯)이 세조의 원종공신이 되면서부터였다.
박형은 세조 때 상호군으로 재직하면서 정난원종공신(靖難願從功臣) 1등에 녹훈되었다. 이때 국가로부터 집과 토지, 노비 등을 하사받고, 후손들이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특혜를 부여받았다. 박형의 아들 박계조(朴繼祖)의 이름을 세조가 지어 줄 만큼 두 사람의 관계는 밀접하였다. 박형은 무과에 등제하여 1510년(중종 5) 삼포왜란을 토평하는 데 공을 세우기도 했으며, 사후에는 국가로부터 용비(龍碑)를 하사 받았다고 한다.
그 뒤 16세기 중반에 박형의 손자인 박윤(朴潤) 형제가 조식(曺植)·배신(裴伸) 등과 사우 관계를 맺으면서 사족으로서의 입지를 다져 나갔다.
[재지 사족으로 나라에 충을 다하다]
박윤 형제의 어머니 유씨(柳氏)가 자녀들에게 상속한 재산 내역을 보면, 16세기 전반인 중종 연간[1525~1556년] 도진박씨[고령박씨]의 경제력을 짐작할 수 있다. 이를 분석한 바에 따르면 박윤 등 자녀에게 상속한 전답이 1850두락 정도로 추정되고, 고령·성주·창녕 등지의 기와집이 220칸이나 되었다. 그 외에 노비들도 많았던 것으로 보아 도진박씨[고령박씨]의 경제력이 매우 부유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도진박씨[고령박씨]는 학문적인 능력과 경제적 기반을 토대로 고령 지역의 향촌 사회를 이끌어 나가는 영도적 위치에 설 수 있었다. 이후, 1592년(선조 25)의 임진왜란과 1597년(선조 30)의 정유재란 때에는 박정번·박정완(朴廷琬) 형제와 그 자제들인 박효선(朴孝先)·박광선(朴光先)·박원갑(朴元甲) 등이 의병을 일으켜 큰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도진박씨[고령박씨] 인물들은 민족적 위난기마다 재지 사족으로서의 책임을 다했던 것이다.
17세기 전반에 박종윤(朴宗胤)은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인으로 문과에 급제하고 광해군 때에는 이조전랑 등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인조반정(1623년) 후 이이첨(李爾瞻)의 대북(大北) 정권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귀양 갔다가 고령으로 낙향하고 말았다.
이후 도진박씨[고령박씨]는 중앙 관계로 진출하지는 못했지만, 고령 일대에서 재지사족으로서의 지위를 꾸준히 지켜 나왔다. 그러다가 개항기와 일제 강점기에는 박기열(朴基烈)이 만주에서 무장 투쟁을 전개하고, 박재필(朴在弼) 등은 3·1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해방 후에는 박경점(朴庚占)이 건국에 기여한 공로로 광복장을 수여 받았고, 6·25전쟁이 일어나자 박수헌(朴壽憲)이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이렇듯 도진박씨[고령박씨]들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등의 국난 시에는 앞장서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이러한 충효일본(忠孝一本)의 사상은 일제 강점기와 6·25전쟁에까지 이어져 국가에 위난이 있을 때마다 적극적으로 현실에 참여하여 충(忠)을 실천하였다. 더불어 박윤과 박택 형제를 비롯한 많은 인물들이 효(孝)와 열(烈)을 다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도진리는 1997년 7월 13일 경상북도 충효마을로 지정되었는데, 현재 마을 입구에 충효마을 지정비가 건립되어 있다.
[정보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