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6A020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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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광활면 옥포리 화양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문예은 |
마을은 사람들이 모여살기 시작하면서 생겨난다. 우리나라 마을 대부분은 집성촌(集姓村)으로 씨족이 구성되고, 마을의 역사가 시작된다. 화양마을이 자리한 광활면은 반대로 땅이 먼저 생기고 사람들이 들어온 곳이다. 농토를 일궈 잘 살아 보겠다는 꿈을 안고 전국 각처에서 온 사람들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곳은 각성바지들[성이 각각 다른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마을 사람 모두 어렵게 살다가 고향을 떠나 왔기 때문에 객지의 외로움을 알고 있었다. 더구나 집을 제외하고는 전부 반듯한 논뿐인 광활에서 옆집에 의지하고, 한 식구처럼 허물없이 지내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이치라고 할 수 있었다.
[마을잔치가 뭐 별건가]
곽정숙[1959년생] 씨가 화양마을 자랑을 하고 나섰다.
“뭐 누구 생일이다 그러면 모이지. 전 부치고, 찌개하고, 김치 담가서 음식 만들어서 초대하면 그게 마을잔치였어. 사람이 모이면 잔치인 거지. 하루가 멀다 하고 모였어. 초상났을 때는 지금이야 장례식장에서 다 하지만 예전엔 안 그랬어. 음식에서부터 설거지, 손님 접대고 뭐고 마을 사람들이 다 같이 밤을 새고 출상까지 동네 사람들이 다 봐 줬어.”
곽정숙 씨의 말에 이후순[1942년생] 씨가 거들고 나섰다.
“나도 여기 와서 놀랬어. 이웃 간에 어찌나 격 없이 지내는지. 우리 친정 고라실에서는 옆집에 놀러갔다가도 그 집 형님이나 시숙 들어오면 부엌문으로 들어갔다가도 뒷걸음질 쳐서 나가고 그랬거든? 하물며 옆집 아버지는 어려워서 말도 못 건넸지. 근데 여기 오니까 ‘아무개 아버지’ 이름 부르면서 너무 허물없게 지내는 거야.”
이후순 씨의 친정인 고라실마을은 집성촌으로, 까다롭게 촌수를 따졌다고 한다. 어른에 대한 예의의 격식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함부로 웃고, 장난도 칠 수 없었다. 하지만 다른 성씨들이 모인 화양마을에서는 위계질서를 따지지 않아도 되었기에 촌수에 얽매여 어려워 할 필요가 없었고, 그래서 더욱 친근하게 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황길례[1925년생] 할머니는 그래서 옛날부터 고향 친구들이 이웃 간의 정을 부러워했다고 말했다.
“복이 있어서 옆집 사람들을 좋게 만나 산다고. 진짜 그 사람들 떠나면 못 살지 싶을 정도로 가깝게 지냈어. 지금도 명절 되면 옆집 아들딸들이 고향 찾으면서 우리 집까지 와서 인사해. 작년에는 가들이 집도 고쳐 줬어. 애들 다 서울 살아. 저 집이고 우리 집이고. 아들들끼리도 사이가 좋아서 지금 같은 데 살어. 잘 지내고 있어.”
지금 농촌은 기계화가 되어 마을 단위로, 혹은 개인이 농기구를 사들여 보유하고 있다. 기계를 이용하면 전통적인 품앗이나 두레와 같은 공동 작업을 거치지 않고도 혼자 힘으로 넓은 대지의 농사가 가능하다. 마을 사람들은 지금이 몸은 편하지만, 서로를 필요로 하여 일손을 주고받는 인정미가 사라진 것 같다며 아쉬워한다.
농번기가 지나고 겨울이 되면 마을 사람들은 식사와 자는 시간을 제외한 하루 온종일을 마을회관에 모인다. 그 빈자리를 윷놀이나 화투, 이야기꽃을 피우며 기계화로 주춤한 마을의 정을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정보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