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6A0201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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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광활면 옥포리 화양마을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문예은 |
[똘물에서 물만 먹고 산 게 아니야]
화양마을이 자리한 광활면에 들어서면 논과 길 옆으로 길게 연결되어 있는 도랑을 볼 수 있다. 다른 지역 사람들이 보면, 땅을 파면 얼마든지 마실 물을 얻을 수 있을 텐데 왜 이렇게 도랑을 만들었는지 의아해 한다.
간척 사업으로 일군 이곳은 다른 지역과 달리 깊이 팔수록 짠기가 그득한 물만 배어 나온다. 할 수 없이 사람들은 식수와 농수를 위해 섬진강 물을 막은 운암호에 의지했다.
운암호의 물은 정읍을 거치고 김제평야를 돌아서 맨 끝인 이곳 간척지까지 먼 길을 타고 내려오는데, 땅을 파도 먹을 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광활한 간척지에서 더할 나위 없는 귀중한 젖줄이었다.
마을을 따라 흐르는 도랑물은 사람들에게 식수만 제공하지 않았다. 설거지를 하고, 빨래도 하고, 김장철이 되면 집집마다 산더미처럼 쌓인 배추를 씻기도 했다. 여름철 아이들이 물장구를 치며 노는 놀이터이기도 했다. 도랑에는 흐르는 물에 자연스럽게 생기는 송사리, 망둑어를 비롯하여 우렁, 참게, 개구리, 뱀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지금은 비싼 값에 거래되는 장어도 그 시절 도랑에서는 눈에 밟히는 흔한 고기였다. 농약이 없던 시절이었기에 물고기를 잡아다가 시래기를 넣고 많이 지져 먹기도 했다.
[더러워도 할 수 없어]
하지만 이 도랑물은 항상 정화를 해서 먹어야 했다. 물속에 여러 종류의 생물이 사는 만큼 배설물도 섞여 있고, 정읍과 김제를 돌아 맨 마지막으로 내려오는 물이었기에 윗마을에서 사용하고 버려진 물이 섞여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근 지역에선 광활 사람들을 똥 기저귀를 빤 더러운 똘물을 마시는 이민촌 사람들이라 놀리기도 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광활 사람들은 집집마다 부엌에 커다란 물 항아리 한두 개씩 묻어 놓았다. 물속에 백반을 넣어 삭히면 아래쪽에 흙덩이와 불순물이 가라앉게 된다. 그러면 위쪽의 깨끗한 물만 퍼서 끓여 먹었다. 그래야 안전하게 마실 수 있었다.
여자들은 하루에 두 번, 물지게로 도랑에서 물을 길어다가 항아리를 채웠다. 물을 긷는 것은 여자들의 몫이었는데, 물을 긷는 데도 요령이 필요했다고 이후순[1942년생] 씨가 얘기해 주었다.
“물 긷는 게 어려워. 쉬워 보이지만 얼마나 어려운데. 매번 물통 가득히 물을 채워서 양쪽에 지고 걸어오는데, 오는 길에 다 쏟느라 집에 도착하면 통에 물이 남아나질 않았어. 아 우리 고라실서는 샘물에서 물이 퐁퐁 솟아나서 그거 먹었지. 내가 물지게를 여기 시집와서 처음 져봤다니까? 그래서 시누들이 물을 많이 퍼다 줬지. 여기서 나고 자랐으니까 당연히 우리 시누들은 물지게가 익숙할 거 아니야. 그것 때문에 시아버지한테 얼마나 혼났다고. 시누들이 퍼다 준 물 먹는다고.”
[정화 시설은 기본으로 있었어]
물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 관리들이 먹을 물을 정화하는 시설이 있었다. 당시 일본 사람들은 모래, 숯, 자갈 등을 넣은 칸 16군데를 통과하여 물을 정화할 수 있게 만들었다. 지면으로 1m, 지하로 1m 크기였으며 지금 광활면사무소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또 주민들이 먹을 수 있는 정화 시설이 지금의 마을회관 자리에 들어왔다고 한다.
화양마을에 상수도가 설치된 것은 1966년경이다.
당시 농림부장관을 지낸 장경순 씨가 상수도 시설을 설치해 줘서, 부엌까지는 들어오지 못하고 마당 문 앞이었지만 꼭지만 돌리면 콸콸 쏟아져 나오는 물줄기에 그렇게 편하고 좋을 수 없었다고 마을 사람들은 입을 모았다.
[정보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