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809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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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廉弼洙 |
영어공식명칭 | Yeom Pilsu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학생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염필수(廉弼洙)[1914~?]는 1920년대 대구 계성 학교에 입학한 뒤 동맹 휴학에 연루되어 학교를 그만두고 1929년 4월 일본 교토도시샤 중학[同志社中學] 4학년에 편입학하였다. 1931년 6월 무렵 대구 지역 중등 학교가 참여한 사회 과학 연구회에 가담하였다. 사회 과학 연구회의 조직은 제1,2그룹을 두고, 제1그룹은 김석구(金石九)·한순(韓錞)·이삼문(李三文)·이경석(李璟錫) 등으로 구성하고, 제2그룹은 염필수를 비롯하여 김일식(金一植)·곽수범(郭洙範) 등으로 구성되었다. 특히 제2그룹은 일반 학생 대중을 의식화하기 위해 구성하였다.
1931년 11월 하순에는 사회 과학 연구회 회원들과 조선 공산주의자 협의회 경상북도 조직원이 결성한 적색 노동조합 건설 대구 협의회(赤色勞動組合建設大邱協議會)[이하 협의회]에 참여하였다. 이 협의회의 부서는 학생부와 공장부, 관공서부, 노동부와 그 밖에 세 부문의 부서를 설치하였다. 협의회의 목적은 “노동자들에게 계급 의식을 주입하여 경제 투쟁을 일으키고, 이를 바탕으로 정치 투쟁으로 전환하여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협의회는 학생층의 반제 투쟁을 노동자와 농민의 반제 투쟁과 연결하는 매개체로서 조직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932년 12월 대구 지방 법원에서 징역 1년, 집행 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1936년 2월 조선 공산당 재건 동맹(朝鮮共産黨再建同盟) 사건에 연루되어 검거되었다. 이 사건에 약 400여 명이 검거되었는데, 그는 예심에서 면소 처분을 받았다. 같은 해 5월 관동 공산당(關東共産黨) 사건에 연루되어 검거되었으나 훈방 처리되었다. 해방 이후 1945년 조선 공산당 대구시당 결성에 참여하고 조직 부장이 되었다. 좌익계의 전국 노동 운동 조직인 전국 노동조합 평의회 대구 지방 평의회의 결성에 참여하고 선전 부장으로 활동하였다. 1946년 10월 사건에 연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