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809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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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郭洙範 |
영어공식명칭 | Kwak Subeom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학생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곽수범(郭洙範)[1910~?]은 1928년 10월 서울휘문 고등 보통 학교 3학년 재학 중 동맹 휴학 사건으로 퇴학당했다. 그 뒤 1929년 4월 서울성봉 중등 학교 4학년에 다시 입학했으나 7월 자퇴했다. 1931년 6월 무렵 김일식(金一植)·염필수(廉弼守)·이경석(李璟錫)·김석구(金石九)·한순(韓錞)·이재우(李載雨)·김홍직(金洪直)·백춘갑(白春甲) 등과 함께 사회 과학 연구회를 조직하였다. 곽수범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1920년대 대구 고등 보통 학교 학생 운동의 경험자들이었고, 학생 운동으로 퇴학과 재판을 받은 뒤 일본 유학을 다녀온 사람들이었다. 사회 과학 연구회는 조직을 제1·2그룹으로 편성하였다. 제1그룹은 김석구·한순·이삼문(李三文)·이경석 등으로 구성되었고, 곽수범은 제2그룹에 김일식·염필수 등과 함께 소속되었다. 특히, 제2그룹은 일반 학생 대중을 의식화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1931년 8월 사회 과학 연구회는 신간회 대구 지회와 연대해 전위 조직 준비 위원회(前衛組織準備委員會)를 조직하였고, 선전부 책임을 맡았다. 전위 조직 준비 위원회의 목적은 “대구에서 좌익 운동의 통일 기관을 결성하여 학생 운동, 노동조합 운동, 사회 과학 연구회 등을 지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뒤 사회 과학 연구회는 대구에 기반을 둔 조선 공산주의 협의회 경상북도 조직과 연대 활동을 벌였다. 이때 제3서방이라는 사회 과학 서점을 열 것을 주장하였다. 1932년 대구 지방 법원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대구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해방 직후 1945년 8월 27일 밤 조선 공산당[장안파] 대구시 위원회의 결성에 참여하였다. 1945년 10월 말에 대구 달성 연합 농민 조합 협의회 결성에 참여하고 부위원장이 되었다. 1945년 11월에는 농민 조합 경상북도 연맹에 참여하고 상임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5년 12월 전국 농민 조합 총연맹 결성 대회에 달성군 대표의 일원으로 참석하였으며, 1946년 4월에는 민주주의 민족 전선 달성군 지부에 참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