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807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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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洪敬孫 |
영어공식명칭 | Hong GyeongSon |
이칭/별칭 | 길보(吉甫),우국재(友菊齋)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병훈 |
[정의]
조선 전기 달성 지역에서 활동한 남양 홍씨 중시조.
[개설]
홍경손(洪敬孫)[1409~1481]은 조선 전기 문신으로 경전과 문학에 뛰어나서 왕명으로 『대학연의집략(大學衍義輯略)』을 편찬하였다. 사후에 아들 홍윤온(洪閏溫)이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자 대구로 내려와 정착한 이래 후손들이 대구 일대에서 번성하였다. 문과로 출사하였는데, 인물이 출중하고 문학이 뛰어나서 중용하자는 논의가 있었지만 고려 왕씨(王氏)의 외손이라는 이유로 주로 무반직(武班職)과 한직(閑職)에 임용되었다.
[가계]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길보(吉甫), 호는 우국재(友菊齋). 7대조는 고려조에 도첨의 중찬(都僉議中贊)을 역임한 홍규(洪奎)로 시호는 광정(匡定)이다. 고조할아버지는 삼사 좌사(三司左使)를 역임한 남양군(南陽君) 홍주(洪澍)이고, 증조할아버지는 당성군(唐城君) 홍징(洪徵)이다. 할아버지는 전법 좌랑(典法佐郞)을 지낸 홍상부(洪尙溥)이며, 아버지는 사재감 직장(司宰監直長) 홍지(洪智)로 고려 왕족인 수연 대군(壽延大君) 왕규(王珪)의 딸과 혼인하였다. 부인은 풍산 김씨(豐山金氏)로 아버지는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김계학(金繼學)이며, 할아버지는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 김응(金凝)이다. 홍경손은 풍산 김씨와의 사이에 3남 1녀를 두었는데, 큰아들은 호군(護軍) 홍윤온, 둘째 아들은 장사랑(將仕郞) 홍윤선(洪閏善), 셋째 아들은 봉상시 부정(奉常寺副正) 홍윤덕(洪閏德)이다. 딸은 현령(縣令) 신성종(愼成終)과 혼인하였다. 맏손자는 사간원 정언 홍계원(洪係元)이며, 다음은 홍찬원(洪纘元)·홍순원(洪順元)·홍치원(洪致元)이 있다.
[활동 사항]
홍경손은 1435년(세종 17) 사마시(司馬試)에 입격하고, 1439년(세종 21)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440년(세종 22)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로 출사하였다. 이후 승문원의 저작(著作)을 거쳐 1443년(세종 25)에는 승문원의 박사(博士), 남부령, 교리(校理)를 역임하였다. 1445년(세종 27) 2월 금구 현령(金溝縣令)으로 나아갔다가 1450년(문종 즉위) 삼군진무 겸 승문원 교리(三軍鎭撫兼承文院校理)를 거쳐 1452년(단종 즉위) 2월 경상도 도사(慶尙道都事)가 되었다. 1453년(단종 1) 6월 형조 정랑(刑曹正郞)이 되었으며, 1455년(세조 1) 10월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가 되고, 12월 27일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1456년(세조 2) 수원 부사, 1457년(세조 3) 의금부 진무(義禁府鎭撫)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1458년(세조 4) 우국재(友菊齋)를 건립하여 시문을 짓고 학문을 닦았다. 1461년(세조 7) 사온서 영(司醞署令)에 제수되었으나 사직소를 올리고 부임하지 않았다. 1472년(성종 3)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1473년(성종 4)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을 역임하고, 1474년(성종 5) 판사헌부사(判司憲府事)가 되었다. 1475년(성종 6) 첨지중추부사 겸 지성균관사(僉知中樞府事兼知成均館事)에 올랐다. 1478년(성종 7) 사직소를 올렸으나 윤허가 되지 않자, 1479년(성종 8) 재차 사직소를 올리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학문과 저술]
1462년(세조 8) 『충음 시고(蟲吟詩稿)』를 저술하였다. 1474년 왕명으로 『대학연의집략』을 편찬해 올려 상으로 내구마(內廏馬)를 하사받았다. 이외에 저서로 『우국재 선생 문집(友菊齋先生文集)』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시문이 실려 있다.
[묘소]
묘는 경기도 양주시 남면 상수리[당시 양주 상수역 북쪽 선영의 왼쪽 계좌]에 있다.
[상훈과 추모]
1771년(영조 47) 후손들이 홍경손의 신도비(神道碑)를 다시 세우면서 1587년(선조 20) 현손 홍성민이 지은 행장을 옮겨 새겼다. 글씨는 10세손 봉조하 홍계희(洪啓禧)가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