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211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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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庶民 -[東區] |
영어공식명칭 | Private Home of the Common People |
분야 | 생활·민속/생활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손경희 |
[정의]
대구광역시 동구 일대에 있었던 서민 살림집.
[개설]
집은 한 가족의 생활근거지이며 생활무대이다. 동시에 그 집에서 사는 생활공동체로서의 가족과 가문을 의미하고 있다. 조선시대 일반 백성들은 농업이나 수공업, 어업 등 직접적인 생산 활동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중의 대부분은 양반의 토지를 빌려 농사를 짓던 농민들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낮은 지위에 속하였다. 경제적으로도 궁핍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에게는 유교의 가르침에 따르는 의례적인 생활보다는 생산 활동을 도와줄 수 있는 실용적인 주택이 필요하였다. 우리나라 남부지역은 산지보다 평야가 많은 지형적 특성과 여름이 길고 무더운 기후적 특성을 갖고 있다. 길고 무더운 여름을 시원하게 보내기 위해서는 바람이 잘 통하는 가옥구조를 가져야 했고, 외부활동이 비교적 자유롭기 때문에 주거공간을 여러 건물로 분산하는 방법이 발달하게 되었다. 또한 넓은 들이 많은 관계로 농업이 발달하였다. 이에 따라 주택 내에서 농사와 관련한 작업공간으로서의 넓은 마당이 반드시 필요했다.
[동구 서민 살림집]
대구광역시 동구 지역의 서민들의 살림집은 해방과 한국전쟁을 겪으며 가옥 신축이 상대적으로 적게 이루어졌다. 1960년대가 지나고 1970년대가 되면 가옥 신축이 차츰 활발해지기 시작한다.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이 시기에는 농촌 주거 환경 개선 사업이 전개되었다. 마을의 모습이 가장 많이 변한 것은 바로 이 시기였다. 대구광역시 동구의 경우에도 1970년대 이전에는 대개 가옥이 초가지붕으로 되어 있었다. 주택 개량사업이 진행되면서 시멘트 기와지붕이나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뀌게 되었다. 흙이나 돌을 이용해 엉성하게 쌓아 놓았던 담도 시멘트 블록 담으로 바뀌는 경우가 많았다. 동구의 가옥 형태는 한옥, 슬레이트 가옥, 양옥 등이었다. 대구광역시 동구의 서민 살림집은 일정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경우가 드물다. 대부분 보존 상태가 불량한 경우가 많다. 동구의 서민 살림집의 구조는 안채, 아래채, 고방 형태였다. 현재 대구광역시 동구의 서민 살림집은 단독주택, 빌라, 아파트 등 다양하다.
[대구 용수동 구경회 주택]
일제강점기 지어진 대표적 서민 살림집으로는 대구 용수동 구경회 주택이 남아 있다. 서민 살림집은 대부분 기와나 초가로 지어진 집으로 현재 서민들이 사는 주택의 형태와 조금 다르다. 대구 용수동 구경회 주택은 1921년 건립된 것으로 대구광역시 동구 용수동 631번지에 있다. 413㎡[대지 125평]에 정침과 행랑의 목조 와가 2동이 건립되었다. 정침 2칸, 행랑 2칸 규모로 지어진 남향 주택이며, 정침과 사랑채는 이자형(二字形)으로 배치되어 있고, 담장은 돌담이다. 현재 대청 앞쪽의 문은 전면적으로 개량한 것이며, 보존 상태가 매우 불량하다.
[대구 지묘동 채종서 주택]
채종서(蔡鍾瑞)의 집은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 1146번지에 있다. 120여 년 전에 채병조(蔡炳祖)씨가 건립했다. 이 집은 세로로 긴 장방형의 대지에 사랑채·안채·아래채·고방채를 튼 ㅁ자형으로 배치하였다. 원래 사랑채 앞쪽에 사주문(四柱門)이 있었으나 근년에 헐려 버렸다. 사랑채와 안채가 앞뒤로 배치되고, 안채 좌우측에 각각 고방채와 아래채가 모로 배치되어 반듯한 안마당을 형성하였다.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기와집이다. 평면은 전면 툇간을 마루로 개방하고 뒤쪽에 각각 서고와 2칸 온돌방 및 대청을 두었다. 맨 좌측에는 툇마루보다 단을 한 단 높여 누마루를 만들고 관수헌(觀水軒)이라 편액하였다.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반 규모의 기와집으로 좌측으로부터 부엌·온돌방·대청·윗방이 병렬로 연결되었다. 앞쪽에는 반칸 규모의 툇간에 개방된 마루를 시설하였다.
[대구 지묘동 최덕교 주택]
최덕교(崔德敎)의 집은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 768번지에 있다. 이 집은 최덕교씨의 4대조가 건립하였다. 그 당시 백미 천석을 생산하여 거부(巨富)의 집이라 불렀다고 한다. 현재는 남향한 안채와 동향한 아랫채가 큰 ㄱ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 반 규모이다. 아랫채는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좌측에 2칸통의 온돌방을 두고 우측에 1칸 크기의 부엌을 배치하였다. 본래 초가였던 것을 근년에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