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206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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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命新 |
영어공식명칭 | Nam myeongsin |
이칭/별칭 | 정수(鼎叟),용암(龍菴) |
분야 | 종교/유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효자·열녀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불로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황동권 |
출생 시기/일시 | 1698년 11월 4일 - 남명신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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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772년 - 남명신 사망 |
출생지 | 남명신 출생지 - 대구광역시 동구 불로동 |
거주|이주지 | 남명신 이주지 - 대구광역시 동구 입석동 |
묘소|단소 | 남명신 묘소 -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
사당|배향지 | 남명신 배향지 -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
성격 | 효자 |
성별 | 남성 |
본관 | 영양 |
[정의]
조선 후기 대구광역시 동구 불로동 출신 효자.
[가계]
남명신의 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정수(鼎叟), 호는 용암(龍菴)이다. 중국 당나라 안렴사(按廉使)로써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에 표착한 남민(南敏)의 후손이다. 증조할아버지는 남실(南實), 할아버지는 남두극(南斗極), 아버지는 남천한(南天翰), 어머니는 인동장씨(仁同張氏)로, 장승길(張承吉)의 딸이다. 부인은 영천이씨(永川李氏)로, 이수천(李壽天)의 딸이다. 남명신은 2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남석로(南碩老), 남팔로(南八老)이고, 딸은 송의수(宋宜修), 류상옥(柳相玉)에게 시집갔다.
[활동 사항]
남명신은 1698년(숙종 24) 11월 4일에 해안현(解顔縣) 불로동(不老洞)[지금 대구광역시 동구 불로동]에서 태어났다. 8세 때 집안 어른에게 글을 배웠다. 집안 어른이 입석동(立石洞)[지금 대구광역시 동구 입석동]에 살고 있어서 불로동과 다소 거리가 있었는데, 아버지가 자식 교육을 위해 입석동으로 이사하였다. 일찍이 효자 여씨(呂氏)에게 나아가 『소학』을 배웠고, 또 백불암(百弗菴) 최흥원(崔興遠)에게 수학하여 마음을 다스리고 자신을 닦는 공부의 요체를 알게 되었다. 남명신은 부모 봉양에 지극정성을 다했다. 날마다 그물을 짊어지고 강에 나아가 고기를 잡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고, 밖에 나갔다가 맛있는 생선을 보면 집에 가져다가 요리해서 부모에게 올렸다.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 삼년상을 치를 때 슬픔 때문에 제사를 올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상국 이성중(李成中)과 어사 한광조(韓光肇)가 번갈아 남명신을 조정에 천거하였다.
남명신은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데 누구보다 앞장섰다. 흉년에 가난한 백성의 토지를 매입했다가 몇 년 뒤에 고스란히 돌려주었고, 길가에 방치된 유골을 발견하면 옷으로 덮은 다음 나무막대로 표시를 해두기도 했으며, 벗이 먼 곳에 갔다가 돌아오지 않아 그 처가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자 목화밭 한 이랑을 주어 생활이 가능하도록 도왔다. 만년에 용암(龍菴) 근처에 서실을 짓고 ‘와룡암(臥龍菴)’이라 편액한 뒤에 장남 남석로와 만년의 은거처로 삼았다. 남명신은 평소 풍을 앓았는데 이때 병이 심해져, 1772년(영조 48)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75세였다.
[묘소]
남명신의 묘소는 하양현(河陽縣) 우암동(牛巖洞)[지금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우암동]에 있다.
[상훈과 추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