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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20518
한자 英陽南氏
영어공식명칭 Yeongyang Namclan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대구광역시 동구 입석동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황동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입향 시기/일시 1600년연표보기 - 영양남씨 입향
본관 영양 - 경상북도 영양군
입향지 영양남씨 입햐지 - 대구광역시 동구 입석동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영양남씨 세거지 - 대구광역시 동구 입석동
성씨 시조 남민
입향 시조 석호 남실

[정의]

당나라 안렴사로서 영덕군 축산면에 표착한 남민을 시조로 하고 남실을 입향조로 하는 대구광역시 동구 입석동에 세거한 성씨.

[연원]

시조 남민(南敏)은 본래 중국 당나라 사람 김충(金忠)으로 755년(경덕왕 14)에 봉명사신으로 일본에 갔다가 풍랑을 만나 영해 축산항 부근에 표착하여 신라에 귀화하였다. 경덕왕이 남씨(南氏)로 성을 내리고 이름을 민(敏)으로 고쳐 영양현을 식읍으로 내려 살게 하면서 남씨 일문을 형성하였다. 이후 남씨는 영양(英陽), 의령(宜寧), 고성(固城), 남원(南原)으로 분파되어 번성하였다. 영양남씨는 찬성사를 지낸 남홍보(南洪輔)를 1세조로 받들고, 대광공파(大匡公派)와 밀직공파(密直公派)로 나누어진다. 대구광역시 동구 입석동영양남씨는 대광공파 후손들이다.

[입향 경위]

영양남씨는 1세조 남홍보(南洪輔)의 7세손 남영번(南永蕃)이 울진에 입향하였고, 남영번의 넷째아들 남수(南須)가 영해에 입향하였다. 남수는 용담 현령(龍潭縣令)을 지냈으며, 수양대군이 단종을 끌어내리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낙향하여 다시는 벼슬길에 오르지 않은 인물이다. 그의 후손 남찬(南鑽), 남계조(南繼曺)를 거쳐 석호(石湖) 남실(南實)에 이르러서 대구광역시 동구 입석동에 입향하였다. 그는 본래 청송 안덕에서 출생했으나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문인이 되기 위해 대구광역시 동구 입석동으로 옮겨왔다. 그는 광해군 대의 혼란한 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과거를 포기한 채 오직 위기지학(爲己之學)에 힘을 쏟았다.

[현황]

석호 남실이 대구광역시 동구 입석동에 입향한 이후 그의 후손들이 번창하여 많은 인물을 배출하고 대구 영양남씨의 맥을 형성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 용암(龍菴) 남명신(南命新)[1698~1772]과 그의 아들 예연(禮淵) 남석로(南碩老)를 꼽을 수 있다. 남명신백불암(百弗菴) 최흥원(崔興遠)의 문인으로, 효성이 지극하여 조정에 천거되었고, 만년에 용암(龍菴) 근처에 와룡암(臥龍菴)을 짓고 장남 남석로와 학문 연마에 매진하였다. 예연 남석로백불암 최흥원의 문인으로, 효성이 매우 지극하였고, 사랑과 구휼로써 백성을 다스리고 청백과 신중함으로써 직책을 수행하였다. 그의 후손들은 두 사람의 유문을 합철하여 『석문세고(石門世稿)』로 간행하였고, 또 정효각을 건립하여 남명신의 효를 칭송하였다. 한편, 1900년 초까지 영양남씨는 집성촌을 형성하면서 거주했으나, 현재는 산업화에 따른 급속한 도시화의 과정에서 거의 해체되어 집성촌으로써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관련 유적]

대구광역시 동구에 있는 영양남씨 유적으로는 석호처사영양남공유허비,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에 있는 정효각(旌孝閣)[남명신·남이각의 효자비]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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