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205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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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徐永坤 |
영어공식명칭 | Seo Yeonggon |
이칭/별칭 | 복여(福輿),겸산(兼山)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근대/근대 |
집필자 | 황동권 |
출생 시기/일시 | 1831년 1월 7일 - 서영곤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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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873년 - 서영곤 향산구로회 회원으로 활동함 |
몰년 시기/일시 | 1913년 - 서영곤 사망 |
출생지 | 서영권 출생지 - 대구광역시 동구 도동 |
수학|강학지 | 서영권 수학지 - 대구광역시 동구 도동 |
묘소|단소 | 서영권 묘소 - 경상북도 칠곡군 |
성격 | 문인 |
성별 | 남성 |
본관 | 달성 |
[정의]
조선 후기부터 일제 강점기까지 활동한 대구광역시 동구 도동 출신 문인 학자.
[가계]
서영곤의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복여(福輿), 호는 겸산(兼山)이다. 고려 때 판도판서를 지낸 서진(徐晉)의 후손으로, 증조할아버지는 서원복(徐元復), 할아버지는 서합(徐柙), 아버지는 서수열(徐秀烈), 어머니는 의흥예씨(義興芮氏)로, 예진열(芮鎭烈)의 딸이다. 부인은 부림홍씨(缶林洪氏)로, 홍헌영(洪憲永)의 딸이다.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서진달(徐鎭達)이고, 딸은 채희봉(蔡熙鳳)에게 시집갔다.
[활동 사항]
서영곤은 1831년(순조 31) 1월 7일에 대구광역시 동구 도동에 있었던 전귀당(全歸堂) 본집에서 태어났다. 서영곤은 여러 번 과거 시험에 응시했다가 낙방한 뒤로 오로지 내면 공부에 치중했는데, 특히 여러 선현의 서적을 읽다가 의심나는 곳이 있을 때마다 차록(箚錄)[간단히 기록]하였다. 지헌(止軒) 최효술(崔孝述)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이때 최효술이 유호사(柳湖社)와 동천사(東川社)에서 강회를 열자 많은 선비들이 몰려와 경전의 의문처에 대해 서로 토론했는데, 서영곤은 여유로우면서도 막힘없이 대답하여 모인 사람 중에 으뜸이었다고 한다. 또한 종형 향려(香廬) 서우곤(徐宇坤)과 날마다 전귀당에서 공부를 하였다. 전귀당은 서시립(徐時立)이 효를 실천했던 곳이다. 한편, 향내에서 나이가 많고 덕이 높은 사람 8명과 함께 중국 백거이(白居易)의 향산구로회(香山九老會)를 모방하여 구로회를 조직한 다음, 좋은 날이면 서로 모여 각자 시문을 짓고 품평하거나 역대의 시문에 대해 토론하였다.
서영곤은 평소 빨리 말하거나 서두르는 기색이 없었고, 아끼는 물건을 아이들이 깨뜨려도 다만 타이를 뿐 혼내지 않았으며, 「구용잠(九容箴)」과 「구사잠(九思箴)」을 지어 자신을 경계하였다. ‘간은 그친다[간지(艮止)]’의 뜻을 취하여 자신의 방에 ‘겸산(兼山)’이라 편액하고, 종일 단정하게 앉아서 의관을 정제하고 시선을 정중하게 하여 마치 엄숙한 흙인형 같았다. 남을 대할 때는 얼굴에 온화한 빛을 띠어 봄바람 같았다. 원근의 선비들이 앞다투어 서영곤을 찾아와 제자를 예를 갖추었는데, 강당에서 다 수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조선이 망하고 일제의 식민지가 되자 두문불출하며 「척이배혹론(斥異排惑論)」을 지어 자신의 뜻을 드러내었다. 1913년 전귀당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83세였다.
[학문과 저술]
서영곤의 저술로 6권 3책의 『겸산집(兼山集)』이 있다.
[묘소]
서영곤의 묘소는 경상북도 칠곡군 이매(利梅)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