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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시립[동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20554
한자 徐時立[東區]
영어공식명칭 Seo Sirip
이칭/별칭 입지(立之),전귀당(全歸堂)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대구광역시 동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황동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78년연표보기 - 서시립 출생
몰년 시기/일시 1665년연표보기 - 서시립 사망
거주|이주지 서시립 거주지 - 대구광역시 동구
사당|배향지 서시립 배향지 - 대구광역시 동구 도평로[지저동]지도보기
성격 효자
성별 남성
본관 달성

[정의]

조선 후기 대구광역시 동구 출신 효자.

[가계]

서시립의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입지(立之), 호는 전귀당(全歸堂)이다. 고려 때 판도판서를 지냈으며 달성군에 봉해진 서진(徐晉)의 후손이다.

[활동 사항]

서시립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 한강(寒岡) 정구(鄭逑),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어려서부터 지극정성으로 조부모와 부모를 봉양했는데, 특히 어떤 음식이라도 반드시 직접 맛을 보고 드렸다고 한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성을 지키기 위해 모두 집을 떠나자 서시립은 15세 나이로 할머니와 어머니를 모시고 팔공산 서봉 턱밑의 삼성암(三省菴)에 피신하였다. 정유재란 때는 가족을 산속으로 피신시킨 다음 동래[지금 부산광역시 동래구]까지 걸어서 왕래하며 쌀을 구해 어른을 봉양하였다. 당시 부사가 이를 가련하게 여겨 이웃 고을의 세미(稅米)를 바꾸어 주었다고 한다.

한편, 당시 예조판서 이호민(李好閔)이 연경동[지금 대구광역시 북구 연경동] 뒤 태봉에 있는 광해군 태실과 관련한 일로 대구에 왔다가 서시립의 효행을 듣고 감동하여 임금께 가져가던 고기, 꿀 등을 그에게 선물로 내려 할머니를 봉양하는 데 보태게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서시립에게 ‘전귀당(全歸堂)’이라는 당호를 주었다. ‘전귀’는 『논어』 「태백(泰伯)」 3장의 주자주 “증자는 온전히 돌아감으로써 몸에 상처 내는 죄를 면했다[증자이전귀위면의(曾子以全歸爲免矣)]”라고 한 데서 취한 것으로, 부모가 온전히 낳아주셨으니 자식 역시 몸을 온전히 보존하여 돌아가야 한다는 의미이다.

[상훈과 추모]

서시립은 사후에 좌랑에 증직되고, 대구광역시 동구 지저동에 있는 백원서원(百源書院)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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