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203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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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五十總選擧 |
영어공식명칭 | 5·10 General Election |
이칭/별칭 | 5·10선거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1948년 5월 10일 대구광역시 동구에서 시행된 제헌국회의원를 선출하는 선거.
[역사적 배경]
5.10총선거는 1947년 11월 14일 유엔에서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구비례에 따른 남북한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정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물론, 해방 후 한반도에 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최고의 권위를 가진 절차는 1945년 12월에 열린 모스크바삼상회의의 결정에 따른 미소공동위원회였다. 그러나 미소공동위원회에 참가할 조선인 정당·사회단체의 성격 문제를 둘러싸고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와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었다. 이에 미국이 한반도 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하였다. 이후 한반도에서는 통일독립국가 건설과 한국정부의 수립이라는 두 방향이 충돌하게 되었다. 그 뒤 전국적으로는 남북협상이 전개되고, 지역에서는 좌익이 단독선거를 반대하는 활동이 계속되었다.
[경과]
1948년 5월 10일 제헌국회의원을 구성하기 위한 선거가 치러졌다. 현 대구광역시 동구 지역은 당시 대구시[현 대구광역시]와 달성군[현 대구광역시 달성군]에 포함되어 있었다. 대구시는 갑구, 을구, 병구의 세 선거구, 달성군에는 한 곳 선거구가 구성되었다. 한국 근대 최초의 민주적 절차에 의한 선거가 치러지게 되었으나 국가건설 방향을 놓고 남과 북, 좌와 우 정치세력 사이에 긴장과 충돌이 고조되는 상황이었다. 5.10총선거 뒤 1948년 5월 31일 제헌국회가 열려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7월 17일 「제헌헌법」을 공포했다. 1948년 7월 20일 국회에서 간접선거로 이승만과 이시영을 초대 대통령과 부통령으로 각각 선출하여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을 선포했다. 5.10총선거 이후에도 동구에는 6연대 사건이 일어났고, 팔공산은 좌익의 빨치산 활동의 무대가 되었다.
[결과]
5.10총선거의 결과는 한민당의 최윤동, 서상일, 백남채 등이 제헌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달성군에서는 김우식(金禹植)이 11,804표를 득표하여 당선되었다. 특히, 공산면, 해안면 등 팔공산과 동촌의 선거 상황에서 김우식은 베이징대학[北京大學] 출신으로 해방 후 유도회 경상북도위원장을 역임하며 한국민주당에 입당해 경상북도 감찰위원장으로 정치활동을 벌인 인물이었다. 또 달성군에서 차점으로 낙선한 박노익은 달성군 하빈면 묘동 출신으로 대구시 중구 계산동에 살며, 동아자동차의 주주로 경제 활동을 벌인 인물이다.
[의의와 평가]
동구의 5.10총선거는 정부 수립에 일정하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국가건설 방안을 놓고 좌우 정치세력간 분화된 상태에서 치러진 한계를 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