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81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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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邱學校評議會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일제 강점기 대구광역시에 설치된 조선인 교육 자문 기관.
[개설]
일제는 조선인 교육에 대한 정책을 마련하기 위하여 1920년 7월 29일 「조선학교비령(朝鮮學校費令)」[제령 제14호]을 공포하였다. 「조선학교비령」은 토지 또는 가옥을 소유한 조선인들부터 부과금을 징수하여 보통학교[일제강점기 초등 교육기관]와 조선인 교육에 관한 학교비(學校費)를 충당하기 위하여 제정한 것이었다. 학교비는 부윤과 군수가 관리하고, 「조선학교비령」 제9조에 의거하여 학교비 운영에 관한 자문 기구로 학교평의회를 두었다.
학교평의회는 의장과 학교평의회 회원으로 조직되었고 의장은 부윤이 맡았다. 학교평의회 회원은 선거로 선출하였고 임기는 4년으로 명예직이었다. 학교평의회 회원 자격은 ‘제국의 신민으로서 독립 생계를 영위하는 25세 이상의 부내 거주자로, 학교비 부과금을 1년에 5원 이상 납부하는 자’로 하였다.
[설립 목적]
대구학교평의회는 1920년의 지방 제도 개정을 “완전한 지방자치를 위한 준비 단계”로 설정한 일제가 조선인 교육행정 자문을 위하여 설치한 기관이다.
[변천]
대구학교평의회는 1921년 1월 구성되었다. 대구학교평의회 회원은 ‘25세 이상의 부내 거주자로, 학교비 부과금을 1년에 5원 이상 납부하는 자’로 정한 회원 자격을 충족할 수 있는 지역 유지들이었다. 1기 대구학교평의회 회원의 임기는 1921년 1월부터 1924년 3월까지였고, 회원은 정해붕·김재영·서철규·김영수·박병태·이정희·정용기·이은후·이종면·정지원·이길우·서병조 등 12명이었다. 2기 대구학교평의회 회원의 임기는 1924년 4월부터 1927년 4월까지였고, 회원은 정운기·박해극·이선호·김재열·서철규·김덕경·김병필·박병태·이종면·김의균·배국인·서병무 등 12명이었다.
3기 대구학교평의회 회원의 임기는 1927년 5월부터 1930년 4월까지였고, 회원은 손치은·서병주·이종면·김영준·김정오·박병태·배영덕·김영택·배국인·정치규·이우진·최순·김재환·김현경·백남채·이도화 등 16명이었다. 4기 대구학교평의회 회원의 임기는 1930년 5월부터 1931년 5월까지였고, 회원은 이동우·곽진영·정치규·유신희·최순·서병일·김익곤·김우진·손치은·진기태·박창근·허지·배국인·배소원·김정오·이상대 등 16명이었다. 일제는 1930년대에 부 학교평의회를 부회(府會) 산하의 교육부회로 통합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대구학교평의회의 설치는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가 1910년 제령 제14호로 공포한 「조선학교비령(朝鮮學校費令)」에 근거를 두고 있다. 「조선학교비령」은 보통학교와 기타 조선인 교육에 관한 비용을 지변(支辨)하기 위하여 제정한 것으로서, 토지 또는 가옥을 소유한 조선인에게서 부과금을 징수하여 조선인 교육에 충당하려 한 것이었다. 대구학교평의회는 「조선학교비령」에 따라 대구부윤(大邱府尹)의 자문기관으로 설치되었다. 의장과 대구학교평의회 회원으로 구성되었으며, 의장은 대구부윤이 맡았다. 대구학교평의회 회원은 선거로 뽑았고, 임기는 4년이며, 명예직이었다. 의장인 대구부윤은 대구학교평의회에 법령이 규정한 학교비에 관한 모든 사항을 자문하고, 학교비의 결산을 대구학교평의회에 보고하였다. 대구학교평의회는 학교비에 관한 의견서를 대구부윤과 기타 관계 관청에 제출할 수 있었다.
1921년 1월 15일에는 대구부윤의 주재로 대구학교평의회 첫 회의가 열렸다. 회원은 정해붕(鄭海鵬)[1871~1950], 김재영·서철규(徐喆圭), 김영수, 박병태, 이정희, 정용기·이은우, 이종면, 정지원, 이길우, 서병조(徐丙朝) 등 열두 명이었다. 1924년 역시 대구학교평의회 회원은 열두 명으로 구성되었다. 1927년과 1931년의 대구학교평의회 회원은 열여섯 명으로 구성하였다.
[의의와 평가]
대구학교평의회는 1914년에 설치된 일본인 교육 자치 기구인 대구학교조합에 비하여 늦은 1920년에 조선인 교육에 관계하기 위하여 설치된 것이었다. 대구학교평의회는 일본인 대구학교조합과 양립하여 대구부와의 관계 긴밀도, 예산 규모, 학교 규모 등에서 차별적 식민지 교육 행정에 내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