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65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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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答金大丘 |
영어공식명칭 | Reply To Kim Daegu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대구광역시 북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곽명재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543년 - 「답김대구」 저자 정구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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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몰년 시기/일시 | 1620년 - 「답김대구」 저자 정구 사망 |
편찬|간행 시기/일시 | 1680년 - 『한강집』 간행 |
배경 지역 | 사수동 - 대구광역시 북구 사수동 |
성격 | 서간류|서 |
작가 | 정구 |
[정의]
조선 후기 대구 일대에 살았던 문신이자 학자인 정구가 대구부사 김윤안에게 보내는 편지.
[개설]
「답김대구(答金大丘)」의 저자 정구(鄭逑)[1543~1620]의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자는 도가(道可)이며, 호는 한강(寒岡)이다. 아버지는 정사중(鄭思中)이며, 어머니는 성주이씨(星州李氏) 이환(李煥)의 딸이다. 이황(李滉)[1501~1570]과 조식(曺植)[1501~1572]의 문인이다. 모든 방면의 학문에 정통하였고, 특히 예학(禮學)에 조예가 깊어 많은 예서(禮書)를 편찬하였다. 정구는 말년에 칠곡 사수(泗水)[현 대구광역시 북구 사수동과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일대]로 이거(移居)하여 후진양성에 힘썼으며, 대구를 포함한 인근 지역의 유학 형성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대구의 연경서원(硏經書院)·도동서원(道東書院) 등 많은 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한강집(寒岡集)』이 있다.
김윤안(金允安)[1562~1620]의 본관은 순천(順天)이고, 자는 이정(而靜)이며, 호는 동리(東籬)이다. 유성룡(柳成龍)[1542-1607]의 문인이며, 구봉령(具鳳齡)[1526~1586]의 사위이다. 김성일(金誠一)[1538~1593]의 문하에 출입하였다. 퇴계학파(退溪學派)를 계승하고, 정구를 스승의 예로 대하였다. 1613년 대구부사(大邱府使)로 제수받았다. 저서로 『동리집(東籬集)』이 있다.
「답김대구」는 김윤안이 대구부사로 재직할 당시 정구가 김윤안과 교류를 하면서 건넨 편지이다.
[구성]
「답김대구」는 『한강집(寒岡集)』 속집(續集)과 별집(別集)에 각각 한 편씩 수록되어 있다.
[내용]
「답김대구」는 정구가 대구부사 김윤안에게 보내는 답장이다.
속집에 실려 있는 편지는 계축옥사(癸丑獄事)에 대한 정구의 처신과 생각을 김윤안에게 말한 편지이다. 정구는 답장을 통하여서 김윤안의 조언을 따르지 못하는 것에 대한 미안함과 자신의 심경을 말하고 있다. 1613년 계축년 여름 정구는 칠십 노인의 몸을 이끌고 계축옥사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기 위하여 먼 길을 떠나기로 마음먹고, 김윤안에게 조언을 받아들이지 못한 미안함과 고민을 전달하였다. 김윤안의 조언에 대하여서는 정확히 확인할 수 없지만 정구가 편지에서 “스스로 곤경을 자초하였다가 뒷수습을 못할까 걱정입니다[亦深悶自致狼狽, 或無以收拾].”라고 말한 것으로 볼 때, 정구의 건강과 의견 개진 후 곤란을 겪을 것을 염려한 것에서 나온 제안일 것이다. 정구의 계축년 상소는 『한강집』「계축차자(癸丑箚子)」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별집에 실려 있는 편지는 거처하는 집 앞 못에 연(蓮)을 심는 것을 도와줄 수 있는지를 김윤안에게 묻는 내용이다.
[특징]
속집에 실려 있는 「답김대구」는 임금에 대한 정구의 충정과 의리를 확인할 수 있고, 표현 양식에 있어서는 정구의 문인 예우(禮遇)를 확인할 수 있다.
별집에 실려 있는 「답김대구」는 정구가 만년에 지은 것인데, 부사로서 김윤안이 아닌 지기(知己)로서 김윤안에게 연을 심는 것을 부탁하는 편지이다. 편지 마지막에는 예전 서사원(徐思遠)[1550~1615]과 송원기(宋遠器)[1548~1615]가 살아 있을 때 넷이서 함께 어울리며 낚시하던 과거를 추억하고, 인간사 장래를 예측할 수 없음을 말하며 연 심는 것을 하루빨리 도와주기를 에둘러 표현하였다.
[의의와 평가]
「답김대구」는 평소 지기로 지냈던 김윤안에게 정구가 보낸 편지이다. 퇴계학파와 대구 지역 인사들의 교류 양상 일면을 확인할 수 있고, 선조(宣祖)[1552~1608] 말 광해군(光海君)[1575~1641] 초 정구의 정치적 입지를 가늠할 수 있는 작품이다. 또한 편지 내용의 구성과 표현 양식에 있어서 완곡한 표현과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높이는 예우는 정구 편지글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