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64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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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丁巳11月日 本府報營狀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대구광역시 북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영호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753년 - 「정사11월일 본부보영장」 저자 홍이간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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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 1797년 - 「정사11월일 본부보영장」 창작 |
편찬|간행 시기/일시 | 1814년 - 『북곽실기』에 「정사11월일 본부보영장」 수록하여 필사본으로 간행 |
저자 몰년 시기/일시 | 1827년 - 「정사11월일 본부보영장」 저자 홍이간 사망 |
배경 지역 | 서명보 효자각 - 대구광역시 북구 산격동 |
성격 | 상소류|계장 |
작가 | 홍이간 |
[정의]
조선 후기 대구 출신인 효자 서명보를 표창하기 위하여 1797년 홍이간이 지어 경상감영으로 올린 계장.
[개설]
서명보(徐命普)[1704~1778]의 본관은 달성(達城)이고, 자가 화극(華極)이며, 호가 북곽(北郭)이다. 아버지는 서익지(徐翊祉)이고, 어머니는 오산김씨(鰲山金氏) 김억추(金億秋)의 딸이다. 서명보는 타고난 성품이 온화하고 인자하며 효성스럽고 근신하였다. 일곱 살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고, 아버지가 중풍에 걸린 이후 사망 때까지 아버지 병환을 돌보았다. 대구 지역 유생(儒生)과 암행어사, 관찰사가 계장(啟狀)을 지어 올려 1799년 통훈대부 공조좌랑(通訓大夫工曹佐郎)에 특별히 추증되었고, 1841년 정려(旌閭)를 하사받았다. 서명보는 지금의 대구광역시 북구 산격동 출신이다. 저서로 『북곽실기(北郭實記)』가 있다.
「정사11월일 본부보영장(丁巳十一月日 本府報營狀)」을 지은 홍이간(洪履簡)[1753~1827]의 본관은 남양(南陽)이고, 자는 원례(元禮)이며, 호는 남헌(南軒)이다. 음사(蔭仕)로 관리에 진출하였다. 형조좌랑(刑曹判書), 임실현감(任實郡守), 대구부판관(大邱府判官), 밀양부사(密陽府使) 등을 역임하였다. 「정사11월일 본부보영장」은 대구부판관일 때 지은 듯하다.
[구성]
「정사11월일 본부보영장」은 4단으로 구성되었다. 대구 지역에서의 효자 서명보의 명성과 지방민들의 표창 염원, 효자로서 드러난 행실, 보고의 합당함을 말하고 있다.
[내용]
「정사11월일 본부보영장」은 대구부에서 경상감영(慶尙監營)으로 올린 계장(啓狀)이다. 대구에서 모두가 칭송하는 효자 서명보의 표창을 바라는 글이다. 표창의 당위성을 밝히고 고을 사람과 경상도 유림 모두가 바라는 일이라 하며 은전(恩典)을 내려주길 청하고 있다. 글 가운데 서명보의 효행을 알 수 있는 문단을 소개하겠다.
“그가 해마다 조목조목 기록한 일기를 보면, 병세와 증후가 어느 정도 더하고 덜한지와 음식과 기거가 얼마나 쇠하고 왕성한지를 손수 기록하는 것을 날마다 일상으로 삼았습니다. 무릇 날마다 하는 일 가운데 부친과 관련되는 것에는 이와 같이 기록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허다한 세월 동안 부친을 섬기는 일이 아니면 다른 일은 전혀 없었으니 이것은 참으로 아들의 떳떳한 도리였습니다. 비록 찾을 수 있는 자취가 없다 하더라도 하나의 행실을 취할 수 있는 것과 비교하면 또한 고인(古人)들도 그렇게 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서효자(徐孝子)’라는 세 글자는 20여 년 이후에도 사람들에게 다른 말이 없이 한입에서 나오는 것과 같은 까닭입니다.”
[특징]
「정사11월일 본부보영장」은 서명보가 생전에 행하였던 효행을 표창하기 위한 사정과 표창의 당위성을 말한 작품이다.
[의의와 평가]
「정사11월일 본부보영장」은 수십 년에 걸쳐 유림들과 판관이 올린 계장 가운데 하나이다. 평생 아버지의 병환을 돌보았던 효자 서명보에게 은전이 내려지길 바라는 고을 사람과 경상도 유림의 바람이 담긴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