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0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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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東範 旌忠閣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대구광역시 수성구 노변공원로7길 7[시지동 500-6]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전일주 |
[정의]
대구광역시 수성구 시지동에 있는 조선 후기 충신 정동범의 정려각.
[개설]
정동범 정충각은 조선 후기인 1728년(영조 4)에 발생한 ‘이인좌(李麟佐)의 난’에 공을 세운 노암(蘆庵) 정동범(鄭東範)[1710~1793]의 충의를 기리고자 1892년(고종 29)에 건립되었다. 정동범은 이인좌의 난 때 열아홉 살의 젊은 나이로 의병을 일으켜 큰 공훈을 세웠다. 난이 평정된 후에는 상훈을 모두 사양하였으니, 당시 성주목사였던 이보혁이 정동범의 공을 치하하자 정작 정동범은 “선비는 군자로서 밝은 세상을 만나 마땅히 인륜의 명분을 밝힘은 학문으로 이름이 들려야지 군공(軍功)으로 이름을 나타내는 것은 옳지 못하다”라고 답하였다. 정동범은 지금의 대구광역시 수성구 노변동으로 귀향하여 은거하고 부모 봉양과 강학으로 남은 생을 보내다가, 여든한 살 되는 1790년(정조14)에 수직(壽職)[해마다 정월에 80세 이상의 관원과 90세 이상의 서민에게 은전으로 주던 벼슬]으로 ‘통정대부 용양휘부호군’에 제수되었고, 1793년(정조17)에 여든넷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정동범 정충각 옆에는 아들인 정지언의 효행을 기리는 정지언 정효각이 나란히 서 있다. 아버지인 정동범도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고 한다. 부모가 병들어 누운 6년 동안을 하루같이 약시중을 하였으며, 매서운 한겨울 추위에도 잉어를 구하여 병구완을 하였다. 부모의 상을 당하였을 때는 슬픔이 지나쳐 기절하였다가 이틀 만에 깨어났다고 하며, 시묘를 하는 동안 정동범의 눈물이 떨어진 곳에는 봄풀이 돋지 않았다고 한다.
[위치]
정동범 정충각은 수성구 노변공원로7길 7[시지동 500-6]에 있는데, 동래정씨(東萊鄭氏) 시지 문중의 재실인 충효재(忠孝齋) 앞에 있다. 정동범 정충각 옆에는 정지언 정효각이 나란히 있다.
[변천]
정동범 정충각은 1892년(고종 29)에 정지언 정효각과 함께 건립되었고, 정충비는 1996년 충효재 성역화 사업 때 세워졌다.
[형태]
정동범 정충각은 정면 세 칸·측면 한 칸에 배면 흙벽이며 맞배지붕·겹처마 양식이다. 정려각 내부의 편액은 ‘충신통정대부행용양위부호군정동범지문(忠臣通政大夫行龍驤衛副護軍鄭東範之門)’이라 되어 있다. 정충각 앞에 서 있는 정충비에 새겨진 비제는 ‘충신통정대부부호군노암청주정공정충비(忠臣通政大夫副護軍蘆庵淸州鄭公旌忠碑)’라 새겨져 있다.
[현황]
정충각은 동래정씨 시지 문중에서 관리하여 보존 상태는 양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