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021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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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儒敎 |
영어의미역 | Confucianism |
이칭/별칭 | 유학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
집필자 | 한정수 |
[정의]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서 행해지는 공자의 사상과 관련한 학문과 의례 및 활동 일반.
[개설]
유교는 공자(孔子) 및 맹자, 증자 등 유가(儒家)의 정치 사상과 학문 수양, 그리고 의례 등의 가르침을 실천하려는 현세적 사상이자 종교이다.
[삼국시대]
충주에서 유교 문화가 성립, 전개되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인물은 신라 때의 문장가로 유명한 강수(强首)이다. 김생(金生)은 명필로도 유명하지만, 그러한 명필의 밑바탕에는 유교 경전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다는 점에서 충주 지역 초기 유교 문화 성립과 관련지어 이해할 수 있다. 특히 강수의 경우 스스로 유교를 택해 배움의 길로 들어서고 스승을 찾아 『효경』·『곡례』·『이아』·『문선』 등을 배웠는데, 들은 바는 비록 낮고 비근하여도 오히려 얻는 바는 높고 깊었다 한다. 당시 중원경이었던 충주 지방의 유교 문화의 이해 정도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고려시대]
고려시대에 들어서서 충주의 호족이었던 유긍달(劉兢達)은 딸을 태조 왕건과 혼인시켰는데 바로 신명태후 유씨였다. 신명태후의 아들이 제3대 정종과 제4대 광종으로 즉위하였으므로 충주는 왕실의 외향이 되어 고려 왕실에서 주목할 수밖에 없는 지역이었다. 실제로 충주는 새로운 수도로서 후보에 오르기도 하는 등 고려시대 동안 중요시되었다.
1381년(우왕 7)에는 충주의 동량면 하천리에 개천사(開天寺)가 사적을 보관하는 사고(史庫)로 이용되었다. 또한 1058년(문종 12)에는 충주목에서 서적을 새로 조판하여 올리는 등 전적 인쇄의 성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이처럼 국가적으로 중요시되었던 충주였던 만큼 지역의 교화와 인재 양성을 위한 향교 등이 있었으리라 여겨진다. 이미 987년(성종 6) 8월에 내린 교서를 보면, 경전과 의서에 통달한 자들을 선발하여 충주목을 비롯한 12목에 경학박사 및 의학박사 각 1인을 파견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고려에는 향학의 형태로 유교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할 것이다.
[조선시대]
조선시대에 들어와 충주의 유교는 더욱 활발해졌다. 『동국여지승람』에서 충주향교는 서북쪽 2리에 있으며 문묘가 갖추어져 있다고 하였다. 사직단도 치소 서쪽에 있어 제사를 올리는 장소가 되었다. 선조 때에 이르러 서원이 세워지기 시작하였는데, 팔봉서원(八峯書院)·운곡서원(雲谷書院)·누암서원(樓巖書院) 등이 있었고 충주 임충민공 충렬사역시 교육 기능을 갖추고 있었다.
유명한 유현(儒賢)의 사우와 묘소가 충주 일대에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 대표적 사우로는 충주 박팽년 사당(신니면)·한남군 사당(용관동)·무릉사(살미면)·도통사(신니면)·장암사당(중앙탑면)·인곡사(금가면) 등이 있다. 묘소로는 손순효(산척면)·최개국(동량면)·허잠(소태면)·이상급(주덕읍 사락리)·김극형(중앙탑면)·허적(소태면)·민정중(엄정면)·권상하(동량면)·정약전(금가면에서 고향으로 이장) 등이 있다.
이외에도 충주는 유교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인륜의 덕목인 충·효·의리를 다한 인물들을 기리는 정려각이 많아 충효의 고장이라 부를 만하다. 특히 임진왜란 때 충주향교 문묘에 있었던 성현들의 위패를 목숨을 걸고 보호하였던 석천수와 석감을 기리는 사당인 호성사가 충주향교 바로 서남쪽에 있어 충주인들이 갖고 있는 유교 문화에 대한 애착을 알 수 있다. 현재도 충주향교는 충주향교유도회 등 단체를 통해 현대에 유교 교육을 다양하게 시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