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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902129
한자 忠孝烈
영어의미역 Loyalty, Filial Piety and Fedelity
분야 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북도 충주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이미숙

[정의]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서 배출된 충신, 효자·효부, 열녀의 총칭.

[충신]

충주에는 많은 충신들이 있다. 1760년(영조 36)에 편찬된 『여지도서』에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백기당(白旗堂) 조웅(趙熊)을 비롯한 4명이 기록되어 있으나, 『조선환여승람』에는 11명,『충주시지』에는 11명이 기록되어 있다. 충주 출신으로 나라와 향리에 헌신한 인물들이 많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취금헌(趣琴軒) 박팽년(朴彭年), 충민공(忠愍公) 임경업(林慶業), 백기당(白旗堂) 조웅(趙熊) 등은 대표적 인물이다.

1. 박팽년

박팽년단종 복위를 꾀하다 희생당한 사람으로, 박중림(朴仲林)의 아들로 회덕에서 태어났다. 1447년(세종 29)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집현전 학사로 경술·문장·필법이 뛰어나 집현전의 집대성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1454년(단종 2)에 형조참판이 되었으며, 1455년(세조 1)에 수양대군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울분을 참지 못하여 경회루에서 자살하려 했으나 성삼문의 만류로 그치고, 집현전의 다른 학자들과 함께 은밀히 복위 운동을 했다.

그 뒤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이듬해 다시 형조참판이 되어 돌아온 뒤 6월 1일에 세조가 명나라 사신을 위한 잔치를 창덕궁에서 열기로 하자 이날을 거사일로 정했으나, 밀고가 있어 성삼문 등 함께 계획에 참여했던 모두가 체포되었다. 세조는 그의 재주를 아껴 모의 사실을 숨기고 자기에게 귀부하면 살려 주겠다는 뜻을 비쳤으나 박팽년은 웃음만 지을 뿐 대답하지 않았으며, 세조를 가리켜 ‘나으리’라 하고 ‘상감’이라 부르지 않았다.

세조가 노하여 “네가 이미 신(臣)이라 칭했으며 내게서 녹을 먹었으니 지금에 와서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고 그게 무슨 소용이냐”고 하자 “나는 상왕(단종)의 신하로 충청감사가 되었으며, 장계(狀啓)에도 신이라 한 적이 없고 녹도 먹은 바가 없다”고 했다. 세조가 실제로 장계목을 살펴보니 과연 ‘신(臣)’ 자가 아니라 모두 ‘거(巨)’ 자로 썼으며, 받은 녹도 모두 창고에 봉하여 두었음을 알았다. 박팽년은 심한 고문으로 그 달 7일에 옥중에서 죽었다.

1691년(숙종 17)에 복관되고 1758년(영조 34)에 이조판서에 증직되었으며, 1791년(정조 15)에 단종에 대한 충신들의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에 올랐다. 충주시 신니면 신청리에 충주 박팽년 사당이 있으며, 1775년(영조 51)에 명정(銘旌)된 박팽년의 충신문(忠臣門)이 있다.

2. 임경업

임경업임황(林篁)의 아들로 충주의 달천들 대림산 아래 풍동(楓洞)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전쟁 놀이를 즐겼으며 항상 대장이 되어 지휘했고, 9세부터 병서와 무예에 힘썼다. 1618년(광해군 10)에 무과에 급제하고 함경도 갑산으로 오랑캐를 막기 위해 나갔고 1620년(광해군 12)에 삼수의 소농보권관(小農堡權管)이 되었다. 1622년(광해군 14)에 지중추부사로 있다가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 때 안현(鞍峴)에서 공을 세워 진무원종공신 1등에 올랐다.

1629년(인조 7) 용양위부호군, 이듬해 평안감사의 종군이 되고, 1631년(인조 9) 검산산성방어사가 되어 퇴락한 용골산성·운암산성·능한산성 등을 수축하고 정주목사가 되었다. 이듬해 부친상을 당해 사직하고 귀향했다. 1633년(인조 11) 상중에 청북방어사에 안변부사를 겸하며 백마산성·의주성을 수축하고, 명나라의 반장(叛將) 공유덕(孔有德)을 토벌하여 명의 황제로부터 총병관(總兵官)의 벼슬과 금화 등 큰 상을 받았다.

백마산성을 방어하기 위해 중국 상인과 무역을 하기도 하고, 유민을 모아 둔전을 개간하기도 했다. 이 공로로 1635년(인조 13)에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올랐으나, 무역 거래로 지나친 이익을 추구했다는 책임을 물어 파직되었다. 이듬해 도원수 김자점의 주장으로 의주부윤에 복직되어 압록강변의 방어 태세를 강화하였다. 1636년(인조 14)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임경업은 백마산성에서 적의 진로를 차단하였으나 적군이 서울로 직진하였고, 이듬해 정월 주화론자 최명길 등의 주장으로 굴욕적인 화의가 성립되었다.

이듬해 청나라가 가도에 주둔을 하고 있는 명군을 공격하기 위해 병력을 요청하였을 때 임경업이 수군장으로 발탁되자 명군에게 이 사실을 알려 주었고, 1640년(인조 18)에 청나라의 요청으로 주사상장(舟師上將)이 되어 명나라의 금주를 공격할 때도 사전에 명나라에 알려 피해를 줄이게 했다. 이 사실이 알려져 청나라로 압송되어 가던 중 탈출하여 명나라의 부총병으로서 청나라를 공격했으나 청의 포로가 되었다.

당시 조선에서 일어난 심기원(沈器遠)의 모반 사건에 관련되었다 하여 1646년(인조 20)에 청나라에서 송환되어 친국을 받던 중 김자점의 명을 받은 형리에 의해 장살(杖殺)되었다. 1697년(숙종 23) 특명으로 복관되었으며, 충주시 단월동에 있는 충주 임충민공 충렬사와 선천의 충민사(忠愍祠)에 제향되고 있다.

3. 조웅

조웅은 좌승지 조일(趙逸)의 아들로 충주시 중앙탑면 가흥리에서 태어났다. 모계(慕溪) 조강(趙綱)에게 배웠으며, 스승이 그의 기개가 호탕하고 체력이 절륜함을 보고 무예를 권하여 말 타고 활쏘기를 익혔다. 1591년(선조 24)에 조헌의 천거로 선전관에 임명되었다. 얼마 후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충주가 적의 수중에 함락되자 스승인 조강을 따라 청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가 의병진을 나누어 충주에 와서 주둔하였다.

충주의 태자산 아래에서 500여 명의 의병을 모아 서울로 북상하는 왜적을 막아 싸웠다. 충청도체찰사가 이 사실을 행재소에 알리니 조정에서는 가상히 여겨 그의 벼슬을 당상관으로 올리고 충주목사를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왜적의 무리와 강북(소태면의 강변)에서 맞서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사로잡히게 되었다. 적은 항복을 권했으나 끝내 저항하다가 죽음을 당했다.

[효자]

『충주시지』에는 효자 58명이 기재되어 있고, 『충주중원지』에는 효자 39명이 기재되어 있다. 『여지도서』에는 최환(崔環)을 비롯한 24명, 『조선환여승람』에는 3대가 효자로서 이름이 높아 삼효정문을 받은 약봉(藥峰) 유충건(柳忠健)을 비롯한 29명, 『예성춘추』에는 매한손(梅漢孫)을 비롯한 39명이 기재되어 있다. 그 중 유충건이성국의 효행을 소개한다.

1. 유충건

충주의 대표적 효자 집안으로 유충건의 가문을 들 수 있다. 유충건은 어려서부터 저녁 때 어버이의 잠자리를 살피고 아침 때 문안을 빠뜨리지 않으면서 자식의 도리를 다하였다. 어버이가 병환이 있을 때는 동분서주하며 지성으로 섬기니 인근에서 모두 감탄하였다. 36세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죽만 먹으며 시묘를 하면서 비바람과 추위와 더위를 피하지 아니하고 아침저녁으로 애통해 하며 호곡(號哭)하다가 병을 얻었는데도 옷을 벗지 않았다. 집안 식구들이 약을 먹도록 권해도 불효라 여기고 입에 대지 않았다. 드디어 어머니의 무덤 아래서 죽으니 인근에서 애통해 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유충건의 아들인 유시량(柳時亮)은 10세에 부친상을 당했으나 장성하여 어머니에게 지성으로 효도하고, 어머니가 위독해지자 대소변을 맛보며 간호하고 손가락을 끊어 피를 마시게 하여 6년이나 명을 연장케 했다. 유충건의 손자이자 유시량의 아들인 유송제(柳松齊)는 아버지가 종기로 고생하자 입으로 빨아내었고, 이로 인해 입 주위에 종기가 나서 문드러지기까지 하였지만 쉬지 않고 계속하였으며, 또 손가락에서 피를 내어 바르기도 하고 그 피를 삼키게 하므로 그 효성을 모두 칭찬하였다. 아우 유계제(柳桂齊)·유회제(柳檜齊)와도 우애가 돈독하여 마을에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처럼 3대가 효자로 이름이 높아 송시열이 「삼효전(三孝傳)」을 써서 정문을 세우게 했는데, 충주시 노은면 안락동에 삼효정려가 있다.

2. 이성국

충주의 또 다른 효자로 이성국(李誠國)을 들 수 있다. 이성국은 훈신 이석번(李碩藩)의 후예로 1591년(선조 24)에 15세로 사마(司馬)에 올랐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듬해 세 차례나 적진으로 들어가 김충선(金忠善)[가토 기요사마의 좌선봉장 사야가의 조선 이름]을 유인하여 귀화시킨 공으로 원종공신에 서록되었다. 선조가 환궁한 뒤에는 충주 봉황산 아래에 와서 살았다.

아버지가 병을 얻어 고생하자 등창을 입으로 빨아서 낫도록 힘쓰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렸다. 또한 어머니가 꿩고기가 먹고 싶다고 했으나 구할 수가 없자 산에 올라가 울며 호소하니 꿩이 닭장으로 날아 들어와서 어머니께 드렸다. 시묘를 할 때에는 송충이가 묘 앞의 나무를 갉아먹어 죽게 되자 그 송충이를 날로 삼키고 계고하니 독충이 모두 죽었다고 한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다고 하며 효성이 지극한 소치라고 하였다. 1885년(고종 22)에 충효의 정려를 짓게 하였는데, 충주시 소태면 동막리에 있다.

[효부 및 열녀]

『충주시지』에는 이유양(李有養)의 처 홍씨를 비롯한 33명의 효부·열녀와 사비(私婢)로 효성이 있어 정문을 받은 숙미(叔美)가 기록되어 있고, 『충주 중원지』에는 윤준(尹晙)의 처 경씨(慶氏)를 비롯한 23명의 효부·열녀가 기록되어 있다. 『여지도서』에는 박징원(朴徵遠)의 처 권씨를 비롯한 열녀 6명과 이명삼(李明三)의 처 김씨를 비롯한 효녀 3명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환여승람』에는 박효인(朴孝仁)의 처 원씨(元氏)를 비롯한 29명, 『예성춘추』에는 김선제(金善濟)의 처 이씨를 비롯한 21명의 효부·열녀가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충주에는 효자 못지않게 효부와 열녀가 많은데 효행의 사례들을 소개한다.

박효인의 처 원씨는 천성이 효성스러워 시아버지와 시어머니의 병환에 밤낮으로 하늘에 기도했고 겨울에 붉은 대추를 얻는 이상한 일도 있었다. 숙부인(淑夫人)에 증직되고 정문이 세워졌다. 윤준의 처 경씨는 남편이 죽으니 장사할 때 스스로 목매어 거의 죽게 되었는데 문중 사람들이 풀어주어 깨어났다. 장사 지낸 뒤에 무덤을 어루만지며 목 놓아 우니 무덤이 두어 자나 갈라졌다. 상복을 마친 뒤에도 아침저녁 제사를 폐하지 않았고 잘 때에는 옷을 풀지 않았다. 김선제의 처 이씨는 성품이 정숙하고 예의범절이 단정하여 어려서부터 효로 부모를 섬겼다. 김씨 문중으로 출가해서는 부도(婦道)를 지키고 시부모를 지성으로 섬겼다. 그 지성에 감동한 고을 사람들이 그 효를 표창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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