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23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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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淸州八大姓 |
영어음역 | Cheongju Paldae Seong |
영어의미역 | Eight Family Names of Cheongju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집필자 | 오갑균 |
[정의]
충청북도 청주시 일원에 세거지를 두고 조선 후기 이후 토호로서 대족을 이룬 여덟 성씨.
[수름재 한산이씨]
한산이씨의 시조는 고려 숙종 때 권지호장에 오른 이윤경(李允卿)이다. 6세로 중시조인 이곡(李穀)은 충숙왕 때 충숙왕 7년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이 도첨의찬성사에 이르렀으며, 아들인 목은(牧隱) 이색(李穡)[1328~1396]은 공민왕 2년 문과에 급제하고 추밀원우부승선을 지내고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한산으로 하였다.
입향조는 목은의 직계 후손 중 광목공파 계열의 15세손 이주(李湊)·이도(李濤) 형제로 1576년(선조 9) 가족을 이끌고 서울에서 청주 북쪽 수름재로 낙향하여 정착하면서 세거지가 형성되었다.
‘수름재’는 인근의 열두 마을을 통칭하는 지역명으로 현 주성동에서 청원군 내수읍 묵방리로 가는 고갯길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즉, 임진왜란 때에 입향조인 이도가 아들 이덕흡(李德洽), 조카 이덕제(德濟)와 함께 그 고갯길에서 참살 당한 후 한산이씨의 원수의 고개라는 뜻의 ‘수리재[讐李峴]’에서 ‘술름재’ 또는 ‘술재’로 변환되었다 하며, 술재를 한자로 주성(酒城)이라 표기했다는 것이다.
집성촌은 현재 행정구역으로 흥덕구 주성동, 주중동과 청원군 내수읍 구성리, 묵방리, 국동리 등 인근에 200 여 호 분포되어 있었으며, 입향 후 후손은 선비의 가문을 이었고 청주의 대족으로 자리를 잡았다.
[모가울 밀양박씨]
시조는 박혁거세이며, 박언침(朴彦忱)이 밀성대군에 봉해진 것을 연유로 해서 본관을 밀양으로 하였다. 중시조는 고려 때 사헌부 규정(糾正)을 지낸 박현(朴鉉)이며 그 9세손 박훈(朴薰)[1484~1540]이 청주에 입향조이다. 박훈은 동부승지로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때 화를 입어 15년간 유배생활 후 풀려나 1533년 청원군 강외면 연제리 외가로 낙향하므로서 이 지역이 세거지가 되었다.
‘모가울’이란 이 곳에 큰 모과나무가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지역명이라고 전한다. 집성촌은 연제리·호계리·오송리·상정리 일원에 1,090여 호가 살고 있었던 대족이다.
[비홍 초계변씨]
시조는 고려 성종 때 문하시중을 지낸 변정실(卞庭實)로서 당시 팔계군(八溪君)[팔계는 초계의 옛 지명]에 봉해졌으므로 본관을 초계(草溪)로 하였다.
중시조는 10세손으로 조선 태종 때 직제학을 지낸 변효문(卞孝文)이고, 입향조는 13세손 변충남(卞忠男)으로 장예원판결사를 지내고 1570년경 충청남도 직산에서 현 청원군 내수읍 비홍리로 옮겨와 장착하므로서 초계변씨(草溪卞氏)의 세거지가 되었고 그 자손이 번연하여 대족을 이루었다. 집성촌은 비상리·비중리·우산리 일원으로 100여 호가 살고 있으며, ‘비홍’이란 지역이 기러기가 날으는 형국이라 하여 비홍(飛鴻)이라 표기하여 부른다.
[너더리 남양홍씨]
시조는 고려의 개국공신으로 삼중대광태사인 홍은열(洪殷悅)이며, 중시조는 13세손인 익산군(益山君) 홍운수(洪云遂)이다.
입향조는 20세손 홍해(洪瀣)로서 기묘사화(1519)때 선대가 화를 입자 피신하다가 1535년경 청원군 미원면 너더리에 정착하면서 세거지가 되었으며, ‘너더리’란 널판의 다리가 있는 동네라는 뜻으로 너더리홍씨로 통용되었다고 전한다. 집성촌은 미원리, 수산리, 용곡리, 화원리 등에 200여 호가 살고 있었으며 후손은 수산리에 남양사(南陽祠)를 세우고 시조와 선조들을 봉향하고 있다.
[대머리 청주한씨]
시조는 고려 태조(太祖)의 삼한 통합 때에 공신으로서 삼중대광태위에 오른 한란(韓蘭)[?~?]으로 청주 방정리에 세거하였으므로 후손들이 청주를 본관으로 삼았다. 이후 1605년(선조38) 방정리에서 시조의 유기(遺基)를 찾아 제단비를 세웠고, 1618년(광해10) 정랑공파 계열의 23세손 한진영(韓震英) 일가가 청주 방정리에 복거하면서 대머리한씨의 세거지가 복원되었다.
일찌기 청주한씨(淸州韓氏)를 ‘대머리한씨’라 부르게된 유래는 ‘대머리’란 말은 대인을 의미하는 ‘大’와 멀(마을의 방언)과의 합성어이고 ‘대멀’은 변음되어 대머리로 불렀다. 따라서 시조인 태위공 한란과 같은 큰 인물이 살던 마을이란 뜻이 담겨있다고 전한다.
집성촌은 현 청원군 남일면 효촌리 일원에 200여 호가 살았으나 현재는 93호가 살고 있으며, 이 고장의 토성(土姓)으로서 시조의 묘역과 유지(遺址)가 남아 있는 명문 씨족이다.
[민마루 여흥민씨]
공자의 제자 민자건(閔子騫)의 후손인 민칭도(閔稱道)가 고려 중엽에 중국의 사신으로 상의국(尙衣局) 봉어(奉御)를 역임하고 여흥(驪興)[지금의 여주]에 정착함으로서 민씨(閔氏)의 시조가 되었다.
입향조는 18세손 민여개(閔汝漑)로 병자호란(1636)이 일어난 이듬해 서울에서 청원군 내수읍에 있는 입암공(立巖公) 민제인(閔齊仁)의 우거지였던 문지 선바위로 낙향하여 정착함으로서 세거지의 기반이 되었다.
이후 중시조인 16세 감창공 민제영(閔齊英)의 맏아들 민사완(閔思完)은 청원군 내수읍 입동리에, 둘째 민사굉(閔思宏)은 미원면 북바위에, 셋째 민사건(閔思騫)은 흥덕구 신전동 추동(楸洞)을 각각 세거지로 삼고 번창하니 모두 300여 호의 집성촌을 이루었고 이 고장 12촌락을 민마루 열두동네[閔宗12洞]라 일컽어지게 되었다.
[머뫼 교화노씨]
시조는 노오(盧塢)로서 교하백(交河伯:경기도 파주)으로 봉작을 받은 것이 본관의 시원이 된다. 중시조는 11세 경원군 노은(盧訔)으로 경원군파(慶原君派)를 형성하였고, 경원군파 계열의 15세손인 해동처사 노유근(盧有謹)이 1454년(단종 2)에 청원군 남일면 가산리 원골마을로 복거하면서 입향조가 되었다. 낙향을 하게된 것은 계유정란(1453) 당시 피살된 영상 황보인과는 외척관계로 연좌를 피하려는데 연유한다.
속칭 ‘머뫼노씨’라 부르는 것은 세거한 동네의 산이 말의 멍에처럼 생겼다하여 멍에산이 변환되어 ‘머뫼’ 또는 ‘머미’라 부르게 되었고, 지명을 한자로 표기하여 가산리(駕山里)라 하였다는 것이다. 집성촌으로 남일면 일원에 300여 호, 신송리 인근에만 200여 호가 살고 있었던 대족으로 선조인 노계원(盧繼元) 등 4형제를 배향하는 체화당(棣華堂) 서원이 있다.
[산동 고령신씨]
시조는 고려조에서 군기감검교를 지낸 신성용(申成用)이고 중시조는 보한재 신숙주(申淑舟)의 일곱째 아들로 영성군(靈城君) 신형(申泂)이다.
입향조는 영성군의 맏아들인 신광윤(申光潤)으로 연산군 때에 갑자사화(1504) 당시 영의정 윤상필이 공의 외손서가 되므로 연좌되어 고초를 겪었다. 다행이 중종반정으로 풀려나 1510년(중종5)경 현재 청원군 북이면 용계리 모애(茅涯)마을로 낙향하였다.
그러나 1537년 그 곳에서 맏아들 신서(申漵)가 사망하자 1540년(중종 35) 청주의 상당산(上黨山)[419m] 동쪽인 청원군 낭성면 묵정리 머그미마을을 택하여 복거하였다. ‘머그미’란 마을명은 이 동네의 우물이 마치 먹물처럼 검게 보이나 떠올려 보면 맑았음으로 ‘먹우물동네’라는 말이 변환하여 머그미라는 속명이 붙혀졌고 한자로 표기하여 묵정리(墨井里)라 하였다고 전한다.
머그미신씨는 이후 크게 번연하여 대족을 이루었고, 집성촌은 청원군 낭성면 관정리, 추정리, 호정리, 귀래리, 청원군 미원면 등지로 퍼져나가 250여 호에 이르렀으며, 머그미에는 현재 육현사(六賢祠)를 비롯하여 여러 기념물이 남아있다.
[의의와 평가]
‘청주8대성씨’는 청주의 토성인 한씨를 제외하고는 모두 다른 지역에 본관을 둔 성씨로서 조선 중기를 전후한 시기에 청주에 입향하여 세거지를 삼고 성장한 씨족이다. 따라서 본관을 붙이지 않고 고장의 칭호를 따서 수름재이씨·모가울박씨·비홍변씨·너더리홍씨·대머리한씨·민마루민씨·머미노씨·머그미신씨 등으로 부른다.
속칭 청주8대성씨는 오랜 전부터 구전하여 오다가 1961년 간행된 『청주지(淸州誌)』에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 대체로 한 고장의 대성(大姓)은 선비 가문을 유지하며 전통사회의 유교적 질서를 진작시키고 지역사회를 교화시키는데 일익이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으나 토호(土豪)로서 권세를 내세우는 역기능적인 국면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