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19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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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淸州韓氏 |
영어음역 | Cheongju Hanssi |
영어의미역 | Cheongju Han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고려/고려 |
집필자 | 오갑균 |
세거지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방서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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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성촌 | 충청북도 청원군 남일면 효촌리|남이면 가좌리|양촌리 |
성씨시조 | 한란(韓蘭)[?~?] |
입향시조 | 한진영(韓震英) |
[정의]
충청북도 청주시에 본관을 둔 성씨.
[연원]
한씨(韓氏)는 기자조선에 연원을 두고 있다. 위만에게 밀려 마한으로 온 준왕(準王)[기자(箕子)의 40대 후손]의 8세손인 원왕(元王)은 3형제를 두었는데, 둘째 아들인 우량(友諒)이 신라의 상당(上黨)[청주의 옛 지명]으로 옮겨 한씨라 칭하였다고 전한다.
사적에 의하면 한씨의 시조는 기자의 후예 우량의 32세손 한란(韓蘭)[?~?]이다. 한란은 고려 태조(太祖)가 후백제의 견훤(甄萱)을 정벌하기 위해 청주를 지날 때 군량미를 도와 삼한 통합에 공이 있으므로 개국벽상공신으로 삼중대광태위(三重大匡太尉)에 올랐다. 그는 청주 방정리에 세거하였기 때문에 후손들은 청주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 왔다.
현재 방정리(方井里)의 행정구역은 방서동으로 되어 있는데 방정이나 방서보다는 ‘대머리’란 이름으로 통용된다. 예부터 청주한씨(淸州韓氏)를 ‘대머리한씨’라 부르게 된 유래는 분명한 것은 아니나 대머리란 말은 대인을 의미하는 ‘大’와 ‘멀(마을의 방언)’과의 합성어이고 ‘대멀’은 변음되어 대머리로 불렸다. 즉 시조인 태위공(太尉公)과 같은 큰 인물이 살던 마을이란 뜻이 담겨져 있다고 한다.
『청주한씨분관연원록』에 의하면 후손이 번창하면서 세거지명 또는 봉군 된 곳을 본관으로 하여 15개로 분적(分籍)하였으나 오늘날 청주한씨로 환적하는 추세라 한다.
[세거지]
시조인 태위공 한란 이래 속칭 대머리를 세거지로 자손이 번창하였고, 고려조부터 벼슬하면서 21개로 분파가 형성되고 세거지는 전국으로 분포되었다. 상당구 방서동에 1930년대에 200가구, 2005년 현재 93가구가 있고, 청원군 남이면 가좌리에 1930년대에 30가구, 2005년 현재 14가구가 살고 있다.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청주에 2,930가구에 9,727명이 거주하며, 청원에도 571가구에 1,877명이 거주하고 있다.
[집성촌]
정랑공파 계열의 23세손 한진영(韓震英)이 1618년(광해군 10)에 청주 방정리에 터전을 찾아 복거하면서 현 상당구 방서동, 청원군 남일면 효촌리 일원에 대머리한씨의 집성촌이 형성되었으며, 번연한 때는 200여호였고, 현재는 93호가 살고 있다. 또한, 절제공파 계열의 18세손 한윤형이 중종 때에 전라북도 정읍에서 현 충청북도 청원군 남이면 가좌리와 양촌리로 세거하면서 집성촌을 이루었다.
[인물]
청주한씨는 단본으로 고려초부터 명문으로 부상하여 조선조에는 문과 합격자가 273여명에 이르리만큼 많은 인물을 배출한 씨족이다. 2000년 전국인구조사표에 의하면 19만9624가구에 64만2992명이다.
한상경(韓尙敬)[1360~1423]은 고려 우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우정언, 종부령을 역임했고, 공민왕 때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조선건국에 공헌하여 개국공신 3등에 책록되었으며, 태종 때 우의정, 영의정을 지냈다.
한계미(韓繼美)[1421~1471]는 조선의 문신으로 1452년 수양대군(首陽大君)을 따라 명나라에 다녀왔고 세조(世祖)가 즉위하자 좌익공신 3등으로 우승지 호조참판 이조판서를 역임했다. 1467년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부임하여 이시애(李施愛) 반란을 평정하였으며, 1470년 서원부원군에 봉해지고 이어 좌리공신 2등에 책록되고 영중추부사를 지냈다.
한명회(韓明澮)[1415~1487]는 조선의 문신으로 수양대군의 심복이 되어 계유정난에 공을 세워 정난일등공신이 되고 세조가 즉위하자 좌익일등공신에 책록되었으며, 이조판서로서 상당군에 봉해졌고, 좌의정, 영의정을 지냈다.
한백겸(韓百謙)[1550~1613]은 청주목사를 지내면서 1605년(선조 38) 시조 한란을 위해 재당(齋堂)을 짓고 ‘청주한씨시조유기서사비’를 세웠으며 비문은 동생인 한준겸(韓浚謙)이 찬하였다.
한원진(韓元震)[1682~1751]은 1725년 영조 때 경연관에 뽑혔고, 호서에 살면서 인물성상이론(人物性相異論)을 제시한 성리학자였다. 저서는 『주서동이고(朱書同異考)』가 있다.
한봉수(韓鳳洙)[1883~1972]는 청주 출신의 의병장으로 1907년 군대가 해산되자 의병을 모집하여 청주 근교에서 일본군을 맞아 싸웠고, 전의, 평택, 여주, 횡성, 문경 등지에서 전투를 벌였다. 3·1운동 때는 청주에서 민중을 지휘하다 잡혀 2년간 복역하였다. 1963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이 수여되었다.
[묘역]
청주한씨의 시조 한란의 묘역은 충청북도 청원군 남일면 가산리에 묘소와 신도비가 있다. 그리고, 청주한씨시조제단비는 상당구 운동리에 1605년에 세운 비로 비문에는 시조 한란과 그 후손의 내력을 적고 유기(遺基)를 찾은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무농정(務農亭)은 상당구 방서동(구명은 방정리) 언덕에 있는 정자이다. 이곳은 시조 태위공이 앞의 넓은 들을 보고 농민들에게 농사에 힘쓰도록 교화하던 자리로 1688년(숙종14)에 세운 무농정유허비가 있다. 그 아래엔 한씨의 시조인 태위공이 쓰던 우물이 네모로 축조되어 있어 그 동리를 방정리(方井里)라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