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5005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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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反共鬪爭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청도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권대웅 |
[정의]
해방 이후 6·25 전쟁 기간까지 경상북도 청도군에서 발생한 반공 투쟁 사건.
[개설]
1946년 5월 미소 공동 위원회의 협상 결렬, 대구 10·1 사건, 2·7 사건 등을 거치면서 남한 내 모든 좌익 세력들이 불법화되었다. 이에 남로당은 무장 게릴라 조직인 남조선 인민 유격대를 전국적으로 5개 유격 전구에 결성한다.
경주·영천·영일·양산·울산·동래·부산을 중심으로 한 영남 유격 지구에 편성된 청도군은 빨치산 활동이 가장 활발히 전개된 지역이었다. 청도군 지역의 빨치산들은 운문산과 비슬산 일대를 거점으로 지서 습격, 방화, 경찰 살인 등을 감행했다.
이러한 이유로 대구 제3 여단 제6 연대 등이 청도 지역에 토벌 부대를 주둔시켜 수시로 토벌 작전을 실시하는 과정에서 좌·우익 간의 여러 가지 사건들이 발생했다.
[매전면 남양 2리 투쟁]
산촌 지역에 위치한 청도군 매전면은 산지로 둘러싸인 지형적 특성 때문에 해방 후 빨치산들이 가장 많이 출몰하는 지역이었다.
1949년 음력 4월 28일 남양 2리 주민들은 마을 뒷산에 수상한 사람 1명[허동락]이 숨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마을 민보단 및 청년들이 주동이 되어 생포한 후 매전 지서에 연락하여 경찰에게 인계하였다. 이 날 생포 작전에는 마을 민보단장[박순형], 구장, 반장 등을 포함해 마을 주민 수십 명이 동원되었다.
1949년 5월 25일 밤 11시경 빨치산 생포 작전에 공로가 컸던 마을 주민들을 포상한다는 명분으로 10여 명의 국군 복장을 한 빨치산들이 마을에 들어 왔다. 당시 생포 작전에 참여했던 주민 모두를 동사(洞舍)에 소집시켰다. 빨치산들은 동사에 집결해 있던 마을 주민들을 향해 총과 칼로 공격하여, 남양 2리 주민 7명이 숨지고 수십 명이 부상을 당했다.
[땅벌 부대]
해방 이후 청도 경찰서에서는 이종찬 경위를 대장으로 한 사찰 유격대, 일명 을부대를 운문사에 파견하여 운문산과 오진리 웅기산 일대의 빨치산에 대한 토벌 작전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을부대 요원만으로는 그 광범위한 지역에 대한 공비 토벌 작전을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땅벌 부대 대장 손수익은 김천 지역에서 빨치산 간부로 활동하다 1개 소대 병력과 경찰에 투항한 인물이다. 김천 경찰서에서 일정한 기간 사상 전향 교육을 마친 후 땅벌 부대를 주축으로 토벌대를 별도로 편성하였다. 청도 경찰서로 파견 온 땅벌 부대는 다른 군경과 협동하여 청도 지역, 특히 운문산 일대 빨치산 토벌 제일선(第一線)에 투입되었다.
1950년 11월 중순경 을부대와 함께 빨치산 근거지 중 한 곳인 가지산 학소대 골짜기를 포위 공격해 운문산 빨치산 대장으로 활동하던 박 모(某)라는 자를 비롯하여 7명을 생포했다. 그 후 잔당들은 오진리 웅기산 빨치산과 제휴하면서 겨우 명맥만 유지해 오다, 1952년 국군 제875 부대가 운문사에 주둔하면서 공비 토벌 작전을 시작한 후 1953년에 완전 소탕되었다.
[운문면 신원리 사건]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에 거주하던 김병찬은 빨치산들에 맞서 싸우다 희생을 당했다. 해방 이후 신원리 일대는 험준한 산악 지형으로 빨치산들이 자주 출몰하여 그들에게 비협조적인 주민들을 학살하고 식량과 가축을 약탈해 갔다.
이런 빨치산의 행태에 분노한 김병찬은 운문 지서에 토벌을 요청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신고 사실이 빨치산에게 알려져 그들에게 잡혔고, 만약 경찰이 출동하면 함께 싸울 것을 강요하였다. 빨치산 요구에 김병찬이 끝까지 불응하자 주민들이 보는 앞에서 칼로 목을 베어 살해하고, 몸에 죽창을 찌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 후 정부에서는 김병찬의 반공 정신과 빨치산들에 대한 투쟁 사실 등을 참작하여 1963년 10월 11일 내각 수반 김현철(金顯哲) 명의의 표창장[제7721호]을 유족에게 수여하였다.
[청도읍 부야리 사건]
1949년 여름 헌병 중사로 근무하던 손의현이 휴가차 고향인 청도군 청도읍 부야리 집에 머물던 중 마을에 침입한 빨치산 1명을 체포하여 서울 헌병대 본부로 압송해 간 일이 있었다.
이 일이 있은 후 1949년 11월 19일 밤 국군 복장을 한 빨치산들이 당시 마을 경비대 본부인 권수복의 집을 방문해, 마을 경비원 전원에 대해 소집 명령을 내려 집결시켰다. 빨치산들은 경비원 7명이 집결하자 모두 감금한 다음 수족을 포박하고, 7명을 차례로 쌓아올린 뒤 죽창으로 마구 찔러 살해하고 시체에 불을 지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만행이 끝난 뒤에도 마을 곳곳에 방화와 약탈을 자행하고 떠났다.
부야리 사건 으로 빨치산에 의해 피해를 입은 사람은 김정현·손종식·형의수(邢義壽)·최종묵· 최갑덕·손인현·권수복 7명이며, 박현채·김종화 2명은 그날 마침 곰티재에서 경비 근무를 하다가 빨치산에 의해 살해당했다.
[화악산 사건]
1949년 7월 초순 청도군 각남면 사리의 경비단장 박재환은 순찰 도중 맞닥뜨린 빨치산 2명과 격투를 벌였는데, 빨치산이 경비단장에게 부상을 입고 도주했다. 그로부터 3∼4일 후에 빨치산들은 이를 보복하려고 다시 출현했으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그 후 1950년 3월 9일 밤 9시경 국군으로 변복한 빨치산들이 마을에 등장하여 경비원을 전원 소집한 뒤, 경비단장 집으로 집결시켰다. 빨치산들은 단장과 경비원들을 방안에 앉혀 놓고서 전원에게 총상을 가한 다음 집과 시체에 방화하는 만행을 범한 후 마을을 떠났다.
화악산 사건 으로 희생된 사람들은 피살자 9명, 중상자 2명, 경상자 7명 총 18명이나 되었으며, 빨치산들은 그 길로 옥산리를 지나면서 경비원 1명을 더 살해한 후 도주하였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1950년 11월 하순경 국군 제875 부대 1개 소대가 마을에 주둔하게 되었고, 1950년 12월에 민가를 침입한 빨치산 1명을 사살했다. 그 후부터는 이 마을에 빨치산이 나타나지 않았다.
[신기 부락 사건]
1952년 3월 17일 12시경 경상북도 청도군 이서면 수야리 신기 부락에 삼성산에 있던 빨치산 약 20명이 습격해 왔다. 이때 마을 보안대의 야간 경비원 2명이 빨치산 습격을 즉시 발견 후 1명은 공비를 쫓고, 다른 1명은 마을 주민들을 깨웠다. 전 주민이 신속하게 동원되어 죽창으로 공비들과 격투 끝에 빨치산 1명을 생포하여 경찰에 인계하였다.
빨치산 생포 사건이 있은 뒤 빨치산들은 이를 보복하기 위해 야밤에 많은 인원을 동원하여 신기 부락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 경비원이 빨치산을 발견하고 즉각 경찰에 신고했으나 경찰 병력 부족으로 직접 추격을 못하고, 대항 사격만 하는 실정이었다. 빨치산들은 마을 입구에 보초병을 세워놓고, 집집마다 방화를 했다. 또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살상하고, 많은 재산을 약탈한 뒤 아침이 되어서야 물러났다.
[정두표 투쟁]
1967년 6월 14일 오후 5시경 운문면 신원리 운문산 기슭 생금비리 마을 정두표(鄭斗杓)의 집에 무장한 빨치산 4명이 침입했다. 침입한 빨치산은 식량을 요구했고, 정두표는 쌀과 닭을 내어주고 후일 더 필요한 물건과 정보를 그들이 지정한 장소로 갖다 주기로 기약하였다. 정두표는 이튿날 운문 지서에 가서 지난밤의 사실을 신고했고, 경찰은 즉각 비상조치를 취하고 정두표가 빨치산들과 약속한 6월 16일 오후 8시에 군경 합동 작전을 펼치기로 하였다. 그러나 작전 당일 이를 눈치챈 빨치산들은 정두표를 살해했고, 빨치산들은 군경 합동 작전 부대에 의해 소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