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6002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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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素砂-事件 |
영어의미역 | Case of Treeorism in Sosa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기도 부천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천경화 |
[정의]
1946년 경기도 부천 지역에서 우익 세력과 좌익 세력 청년들의 대립으로 일어난 사건.
[역사적 배경]
해방정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부천의 정치상황은 구체적인 자료가 부족하여 정확히 재구성하기는 어렵다. 다만 좌익의 정치거물 이승엽(李昇燁)으로부터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이승엽은 부천 출신으로 인천상업학교를 중퇴한 후 1925년 9월 화요계 공산당에 가입하였고, 1937년부터 2년간 복역하였다. 출옥 후 1941년부터 해방될 때까지 식량배급조합(미곡상조합) 이사로 있었다.
이승엽은 동시에 일제강점기 말 여운형이 조직한 건국준비위원회 군사위원회에서 활동하였다. 해방 후에는 조선공산당 경기도당위원장 및 중앙위원회 정치국위원을 역임하는 등 실질적으로 조선공산당[남조선공산당]의 2인자였으며, 한국전쟁 당시에는 서울시인민위원회 위원장까지 역임하였다.
이와 같이 조선공산당 내에서 막강한 위치에 있었던 이승엽의 역할은 부천 지역에서 좌익 세력이 활동하는 데 여러 가지로 유리한 공간을 마련해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자료의 미비로 당시의 좌익 세력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활동을 하였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해방 직후인 1945년 11월 20~22일에 걸쳐 서울에서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가 개최되었는데, 이때 대회에 출석한 부천군 대표는 조운호(趙雲鎬)·최봉남(崔鳳南)·최남수(崔南守) 등 3명이었다. 1945년 12월 8~10일에 걸쳐 열린 전국농민조연맹결성대회에 참석한 부천군 대의원은 앞의 최남수와 조원상(趙源常)·이승엽 3명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부천에는 좌익 세력이 이승엽을 중심으로 일정한 영향력을 미쳤을 것으로 본다.
이러한 초기 상황도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다른 지역에 비해 미군이 일찍 진주하였고, 한민당과 우익청년단체의 조직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부천 지역 우익진영의 활동은 인천에서 결성된 서북청년회 활동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좌익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인천 지역 우익 진영은 내성교회 목사 김영섭(金永燮)과 조선일보 인천지국장 최진하(崔晉夏), 항일 여투사 김경내(金景乃) 및 연예인 정해궁(鄭海宮) 등이 1945년 9월 중순 국민회를 조직하고 활동하였다.
이후 국민회 인천지부 부회장인 정해궁은 양제박(梁濟博)·이범진(李汎鎭)·하상훈(河相勳)·전두영(全斗榮) 등과 함께 1945년 10월 1일 한민당 인천지부를 조직하였다. 또한 한민당 인천지부장으로 활동하는 곽상훈(郭尙勳)이 재경서북청년회 본부와 협의하여 국민회 인천지부를 모체로 1946년 7월 31일 정토사(淨土寺)에서 평안청년회본부 총무부장 송태윤(宋泰潤)의 지도 아래 평안청년회 인천지부를 결성하였다.
당시 간부진은 지부장 송태윤, 사무국장 현석종(玄奭鍾), 임원 박청산(朴靑山), 김관호(金觀浩), 김덕형(金德亨), 선전국장 이량(李亮), 실천국장 석재민(石在玟), 상임위원 김태식(金泰植) 등으로 구성되었다. 그 후 평안청년회 인천지부는 ‘대구 10월폭동’의 여파로 밀어닥친 인천 좌익 세력의 활동에 대항하기 위하여 조직을 재정비하였다.
즉 재인천함북청년회·함남청년회·황해청년회 등과 연합하여 1946년 12월 14일 전 평안청년회관인 편조사(遍照寺)에서 서북청년회 인천지부를 조직하고, 지부장 현석종, 부지부장 이영진(李英震) 등이 활동하였다. 이후 1947년 1월 초순에는 서북청년회 인천지부가 서북청년회 경기도본부로 개칭·발전하였다. 이때 부평에서도 지부가 결성되었는데, 당시 위원장은 우문국(禹文國), 부위원장은 박효인(朴孝仁)과 한신(韓信)이었다.
광복 이후 부천 지역의 청년운동은 서울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면서 전개되었다. 당시 신문에는 1946년 4월 14일 경인선 오류동에서 거행된 대한독립촉성 오류동청년회 결성식에서 서울 본부와 소사청년회가 참석하였다는 기사가 있다. 같은 해 7월 21일에는 오류동에서 대한독립촉성전국청년동연맹 오류동지구연맹 대표회의를 개최하였으며, 1947년에는 소래청년회에서 정기총회를, 소사북부청년회에서는 임시총회를 개최하고 임원을 개선한 사실이 확인된다.
이때 소래청년회의 회장은 이순필(李順弼)이었으며, 소사북부청년회의 회장은 염흥봉(廉興鳳), 부회장은 이준용(李俊龍)이었다. 또한 부천 지역에서는 대동청년단[단장 이청천] 지부가 결성되어 활동하였다.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당시 대동청년단 경기도단 부천군단 단장은 이정섭(李正燮)이었으며, 1948년 11월 현재 간부진은 단장 이도영(李道榮), 사무과장 문인구(文仁龜)였다.
또한 민족청년단(民族靑年團)[단장 이범석] 부천군 갑구단부가 1948년에 결성되었다. 이외에 부천 지역에서 우익청년운동에 종사한 것으로 이름이 확인되는 인물은 석보경(石寶慶)·박세병(朴世秉)·이성훈(李成勳)·홍광모(洪光模)·김헌경(金憲經) 등이 있다. 이와 같이 해방 정국에서 부천 지역의 정치상황은 해방 초에는 주로 좌익세력이 활발한 활동을 펼치다가, 새롭게 등장한 미군정과 한민당, 각종 우익청년단체의 활동으로 인해 양 세력은 각축전을 펼치는 과정으로 전개되었다.
[경과]
좌우익세력이 각축전을 펼치는 과정에서 상징적으로 나타난 사건이 바로 1946년 8월 15일에 일어난 이른바 소사테러사건이었다. 사건 당일은 해방 1주년 기념행사일이었다. 이날 오후 10시 40분부터 경인민족청년단·인민위원회·전국노동조합평의회 소속 500여 명이 소사 대한노총과 독립촉성국민회 간부를 비롯한 우익 진영 요인들을 흉기로 구타하여 70여 명의 부상자를 냈다.
[결과]
소사테러사건의 원인과 발단, 과정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이 참사로 인하여 병원은 부상자로 넘쳤고, 몇 군데 안 되는 병원으로는 부상자를 다 수용할 수 없어 여관까지 빌릴 정도였다. 이튿날 서울에서 조병옥 경무국장과 장택상 수도경찰청장까지 내려와 사건 수습에 나서기도 하였다.
[의의와 평가]
1946년 5월 제1차 미소공위가 결렬된 후 벌어진 미군정의 좌익 세력 탄압, 이에 대한 좌익의 반발과 좌우익 세력 간의 테러가 빈번하게 일어나는 와중에서 발생한 소사테러사건은 해방 후 가파른 이념과 감정의 대립이 낳은 상호 테러와 보복 테러의 악순환의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