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6014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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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承燁 |
영어음역 | Yi Seung-yeop |
이칭/별칭 | 이양경(李良敬)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경기도 부천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추교찬 |
[정의]
일제강점기 활동한 부천 지역 출신의 사회주의 운동가.
[활동사항]
이승엽은 어렸을 때 뱃사공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인천으로 이주한 뒤, 1919년 인천상업학교에 재학 중 3·1운동에 가담하여 퇴학당하였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정칙영어학교(東京正則英語學校)에 입학하였다가 퇴학당하고, 보성법률학교에 입학하였으나 다시 중퇴하였다.
1923년 공산청년동맹에 가입하고, 1925년에는 화요회계의 제1차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였으며, 조선노동총동맹중앙집행위원을 역임하였다. 1925년 조선일보 인천지국 기자가 되었지만, 1926년 사직하였다. 그 후 인천 제물포청년회, 인천노동청동맹회, 인천무산청년동맹 등에 가입하여 서무위원을 지내다가 조선공산당사건으로 일제에 체포되었으나 이듬해 석방되었다. 1927년 3월에는 조선공산당 고려공산청년회 사건에 관여하여 입건되었다.
1930년 3·1운동 11주년을 기하여 부산에서 박장송(朴長松), 안영달(安永達), 김형윤(金炯潤) 등과 함께 「전조선 피압박 피착취계급에 격(檄)함」이라는 전단을 제작, 배포하려다 검거되어 복역하였다. 1936년에도 함흥에서 조선공산당청년동맹 재건운동에 관계하다가 1937년 제4차 조공청맹사건으로 1939년까지 복역하였다. 1940년 다시 체포되었으나 전향서를 쓰고 출옥하여 동료였던 박남칠과 함께 인천 식량배급조합 이사로서 공산주의 운동을 이탈하였다.
해방 후 1945년 10월 6일 인천시장을 선출할 때, 좌익 계열에서 조봉암·박남칠·김용규와 함께 입후보하였다. 그러나 중앙에서 활동하기 위해 박남칠에게 인천 지역의 운동을 맡기고 서울로 향하여 해방 후 최초로 조직된 장안파 공산당 제2비서를 지냈다. 박헌영계와 합류하여 1945년 9월 재건파 조선공산당 정치국원에 선임되고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사법부장 대리로 활약하였다.
19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 상임위원에 선출되고, 박헌영이 월북하자 대리임무를 수행하면서 남조선노동당중앙위원, 경기도당위원장, 『해방신문』 주필 등을 역임하던 중 1948년 박헌영의 지시로 월북하여 최고인민회의대의원, 사법상을 역임하였다.
이승엽의 업무는 대남사업, 특히 빨치산에 의한 유격투쟁의 지도에 집중되었는데, 이를 위해 1947년 7월 남한에서 산발적으로 진행되던 유격투쟁을 조직적이며 대규모로 전개하기 위해 유격대를 3개 병단으로 재편성하였다. 이 가운데 오대산지구의 제1병단은 이승엽의 지령으로 북한에서 조직되어 남파되었다.
또한 1947년 10월에는 강동정치학원을 설립하여 유격대 지도자의 양성에도 힘을 기울였다. 이승엽의 지도 아래 남한의 유격대들은 1949년 9월 공세를 정점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크고 작은 투쟁을 전개하였다. 1950년 6·25전쟁 발발 이후 서울시 임시인민위원장을 지냈고, 1951년 노동당비서, 1952년 인민검열위원장을 역임하였으나 1953년 8월 남로당계 숙청재판을 받고 사형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