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8007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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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甑山里 全州 李氏 集姓村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충청남도 보령시 주산면 증산리 |
시대 | 조선/조선,근대/근대,현대/현대 |
집필자 | 문광균 |
[정의]
충청남도 보령시 주산면 증산리에 있는 전주 이씨 세거지.
[개설]
증산리 전주 이씨 세거지는 이덕온(李德溫)[1562~1635]이 충청남도 보령시 주산면 증산리에 입향하면서 조성되었다.
[명칭 유래]
증산리(甑山里)는 한글 ‘시루메’의 한자 표현이었지만, 이후 내증리(內甑里)[증산리 2구]와 외증리(外甑里)[밧시루메의 한자 표현, 증산리 2구]를 합친 의미로 되었다.
[현황]
이덕온이 1618년(광해군 10)에 입향한 이후 이덕온의 후손들이 지속적으로 세거하고 있다.
[압향경위]
입향조 이덕온은 세종의 4남인 임영대군 이구(李璆)[1420~1469]의 현손(玄孫)이다. 이후 관직에 출사하여 예조와 병조의 낭관(郎官)과 홍문관(弘文館) 등의 요직과 외관직(外官職)을 역임하고 난 뒤에 우부승지에 올랐지만, 광해군(光海君)[1575~1641이 즉위한 뒤에 영창대군(永昌大君)[1606~1614]의 박해가 옳지 않은 것을 간언하였다가 대북파에 의하여 삭탈관직(削奪官職)[죄를 지은 자의 벼슬과 품계를 빼앗고 벼슬아치의 명부에서 그 이름을 지우던 일]을 당하면서 1618년(광해군 10)에 낙향하여 보령 주산면 증산리에 은거하였다.
보령으로 입향한 까닭에 대해서는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조선 후기 정치적인 이유로 내포 지역으로 이거하였던 사례 중 하나로 추정된다. 1623년(광해군 15)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면서 이덕온의 관작이 회복되어 울산부사의 벼슬이 내려졌지만, 출사하기를 거절하고 주산면 증산리에서 지속적으로 거주하면서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1년 뒤에 이괄(李适)[1587~1624]의 난에 공주로 피난 온 인조를 호위하였지만, 이괄의 난이 종료된 뒤에 다시 보령으로 돌아갔다.
[관련유적]
경기도 구리시에 있던 이덕온의 묘소뿐만 아니라 아버지 이뢰(李雷)와 할아버지 이지(李枝)의 묘소도 세거지인 충청남도 보령시 주산면 증산리로 이전되었다. 또 이덕온의 재실(齋室)[무덤이나 사당 옆에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지은 집]과 이덕온의 신도비도 보령시 주산면 증산리에 자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