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1007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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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奎甲 |
영어공식명칭 | Lee Gyugap |
이칭/별칭 | 원서(元瑞),운호(雲湖)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남도 아산시 영인면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병기 |
[정의]
충청남도 아산 출신의 항일 독립운동가이자 감리교 목사.
[개설]
이규갑(李奎甲)[1887~1970]은 1919년 인천 만국공원에서 개최된 국민대회에 13도 대표로 참석 후 상해로 망명하였으며,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충청도의원을 맡았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목회자로 선교 활동과 교육사업을 하였으며, 1929년 신간회 활동에 참여한 이후 목회 활동을 계속했다. 해방 후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가계]
이규갑의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원서(元瑞), 호는 운호(雲湖)이다. 아버지 이도희와 어머니 박안라 사이의 차남이다.
[활동 사항]
이규갑은 충무공 이순신의 10세손으로 1906년 한성사범학교를 졸업, 후에 감리교 협성신학교를 졸업했다.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수학하였으며 1907년에는 홍주의병에 참가하였다. 1911년 공주 영명여학교에서 교편을 잡는 한편, 1917년에는 공주 여자야학교를 직접 설립하는 등 교육사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3월 20일 인천 만국공원에서 개최된 국민대회에 13도 대표로서 한성임시정부를 조직하는 데 참여하였다. 특파원으로 상해로 파견되어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충청도의원에 선출되었고, 상해 한인청년당 등 대한민국임시정부 외곽단체에서 활동하였다. 중국 흑룡강성의 삼일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애국청년혈성당(愛國靑年血誠團)을 조직하는 등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미국 남감리회 소속 목사로 선교 활동과 교육사업에 종사하였다. 1927년 귀국한 후 1929년 신간회 경동지회 설립을 주도하였다. 신간회 해소 이후에는 목회 활동에 전념하여 돈암교회, 광화문교회, 의정부교회 등에서 시무하였다.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에서 활동하였으며 감리교회 재건 운동에도 주역으로 참여하였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대한국민당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충국열사기념사업회 회장, 대한기독교반공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하고 민주공화당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을 받았다.
[상훈과 추모]
정부는 이규갑의 독립운동 공훈을 기려 1962년에 건국공로훈장을 서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