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1006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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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洪可臣墓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능묘 |
지역 |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대동리 산4-1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민규 |
피장자 생년 시기/일시 | 1541년 - 홍가신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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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장자 몰년 시기/일시 | 1615년 - 홍가신 사망 |
현 소재지 | 남양홍씨 문장공파 종중 묘역 -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대동리 산4-1 |
성격 | 묘 |
관련 인물 | 홍가신 |
소유자 | 남양홍씨 문장공파 종중회 |
관리자 | 남양홍씨 문장공파 종중회 |
[정의]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대동리에 있는 조선 후기 문신 홍가신의 묘.
[개설]
홍가신(洪可臣)[1541~1615]은 조선 후기 문신으로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흥도(興道), 호는 만전당(晩全堂),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1596년 홍주목사 재임 시 이몽학(李夢鶴)이 반란을 일으키자 민병을 규합해 난을 평정해 청난공신(淸亂功臣) 1등에 책록되고 영원군(寧原君)에 봉해졌다. 학문에도 깊이가 있었으며, 형조판서를 지내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홍가신 묘는 홍가신이 살았던 마을의 선영에 있다.
[위치]
홍가신 묘는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대동리 남양홍씨 문장공파 종중 묘역에 있다. 곡교천 북쪽의 지방도 624호선[이순신대로]의 백암교차로에서 북쪽 마을 길로 접어들어 백암2리 마을회관 등을 지나 2.3㎞ 가면 대동리 마을회관 앞 삼거리에 이르는데, 그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용두천 옆길을 따라가다 300m 지점에서 오른쪽으로 다리를 건너 100여m를 가면 홍가신기념관이 나온다. 홍가신 기념관에서 오른쪽 뒤에 종중 묘역이 있다. 현충사 뒤가 되며, 음봉면과의 경계가 되는 물한산에서 동남쪽으로 길게 뻗어내린 산줄기의 끝자락 남향 사면에 묘역이 조성되어 있다. 홍가신 묘는 선영 상단의 부모 묘 가까이에 있다.
[형태]
홍가신 묘는 부인 재령이씨(載寧李氏)[1540~1615]와 쌍분으로 조성되어 있다. 각 봉분은 현대에 설치한 호석(護石)으로 둘려 있다. 봉분 앞에는 상석, 향로석, 동자석이 설치되어 있다. 동자석은 대리석으로 제작되었으며, 쌍계(雙髻)가 표현된 전형적인 동자석의 모습이다.
봉분 왼쪽으로 신·구(新·舊) 묘표 2기가 건립되어 있다. 구 묘표는 앞면에 ‘숭정대부 영원군 치사 홍공가신지묘. 정경부인재령이씨부좌(崇政大夫寧原君致仕洪公可臣之墓. 貞敬夫人載寧李氏祔左)’라고 새겨져 있으며, 뒷면에는 홍가신이 1608년에 직접 지은 자명(自銘)이 새겨져 있다. 홍가신은 선영 아래로 은퇴해 머물면서도 ‘우국망가(憂國忘家)[나라에 대한 걱정에 집안조차 잊고]’, ‘백수단충(白首丹衷)[머리는 희어도 마음은 붉다]’라고 소회를 기록하였다. 이 묘표는 1770년 후손들이 건립한 것으로, 비석 받침[비좌]과 윗부분이 둥근 원수형(圓首形) 몸돌[비신] 모두 대리석으로 제작되었다.
금관조복(金冠朝服)을 갖춘 문인석은 17세기 중반경의 양식이며, 망주석도 문인석과 제작 시기가 같다. 그러나 문인석은 동자석과 조각 솜씨, 재질 등 큰 차이가 있어 제작 시기와 장인은 다르다고 추정된다.
[현황]
홍가신 묘는 근래에 묘역을 정비하면서 봉분에 새로 호석을 두르는 등 일부가 원래 모습에서 변형되었다.
[의의와 평가]
홍가신 묘는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조선 후기 사대부 묘의 품격을 엿볼 수 있는 유적이다. 동자석은 지역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며, 문인석은 충청남도 공주시 이인면 만수리에 있는 이귀(李貴) 묘 문인석과 양식적 연관성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충청남도 지역 문인석 연구에 매우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