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1005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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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洪可臣神道碑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만전당길120번길 25[대동리 76]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민규 |
[정의]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대동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신도비.
[개설]
홍가신(洪可臣)[1541~1615]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흥도(興道), 호는 만전당(晩全堂),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신도비는 2품 이상의 고위 문무 대신의 묘 앞에 세우도록 되어 있는데, 홍가신 신도비는 홍가신의 사후 증직(贈職)으로 묘 앞에 세워졌다.
[건립 경위]
홍가신 신도비의 비문은 홍가신의 아들 홍절(洪楶)이 조경(趙絅)[1586~1669]에게 부탁하였는데, 조경이 비문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있다가 손자 홍우원(洪宇遠)이 다시 청하여 1657년에 완성하였다. 그러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비문 완성 이후 61년 만인 1717년에 홍가신 신도비가 건립되었다.
[위치]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대동리 76번지, 홍가신 묘에서 동남쪽으로 직선거리 400m 정도 떨어진 산줄기 끝자락의 바위 위에 세워져 있다. 대동리 황골마을 진입로와 탕정면 용두3리 산골마을 진입로의 갈림길에서 오른쪽 산골마을 북쪽으로 200m 정도 올라간 지점의 길 왼쪽에 보인다.
[형태]
홍가신 신도비는 비석 받침으로 천연 암반 상단을 다듬어서 비좌(碑座)를 얕게 만들고, 그 위에 비신(碑身)과 지붕돌[蓋石]을 올렸다. 비신은 4면에 모두 글씨를 새겼으며, 비신 상단을 둘러 ‘판서치사증우의정 시문장공 만전홍선생 신도비(判書致仕贈右議政諡文莊公晩全洪先生神道碑)’라는 내용을 전서(篆書)로 새겼다. 지붕돌은 비석의 규모에 비해 낮게 제작되었으며, 위쪽에는 용마루와 추녀마루 등을 조각하고, 아래에는 수평부재를 얕게 새겼다. 홍가신 신도비는 높이 241㎝, 폭 100㎝, 두께 42㎝이다.
[금석문]
홍가신 신도비의 비문은 ‘판서치사증우의정 시문장공 만전홍선생 신도비(判書致仕贈右議政諡文莊公晩全洪先生神道碑)’이며 조경(趙絅)이 지었다. 비문 글씨는 김세흠(金世欽)이 행서(行書)로 쓰고, 전자(篆字)는 권규(權珪)가 썼다.
[의의와 평가]
홍가신 신도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공신인 만전당(晩全當) 홍가신의 행적을 기록한 역사 자료이다. 큰 바위 위에 비석을 세운 점도 특별하다. 홍가신은 홍주목사 재임 중 이몽학의 난이 일어나자 가족을 홍주성으로 데리고 와서 결전의 의지를 보였고, 고을 백성들의 마음을 얻어 난을 평정하게 되었다. 사후에 홍주에서 신격화되어 백월산의 제당에 모셔질 만큼 민심을 얻었던 홍가신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