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1005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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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衛忠巖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산정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홍승균 |
현 소재지 |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산정리 4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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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표석 |
관련 인물 | 이순신 |
재질 | 화강석 |
[정의]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산정리에 있는 이순신 묘와 관련된 조선 후기의 표석.
[개설]
충무공 이순신이 임진왜란 최후 전투였던 노량해전에서 1598년(선조 31) 11월 19일 순국한 뒤 이순신의 유해는 경상남도 남해 관음포 이락사에 임시로 모셔졌다가 전라남도 완도군 고금면 묘당도 월송대에 며칠간 안치되었다. 1598년 12월에 이순신의 유해는 육로를 이용해 충청남도 아산으로 운구되었고, 운구 경로는 고금도로부터 마량-강진-석제원-영암-나주-남평-광주-장성-태인-금구-삼례-여산-은진-노성-공주-천안-금곡-아산으로 이어졌다. 이순신의 유해는 본가[현재 이충무공 고택]에 초빈(草殯) 형태로 모셔졌다.
이듬해인 1599년 2월 11일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 본가로부터 약 9㎞ 떨어진 음봉면 금산[금성산] 동남쪽에 안장하게 되었다. 이순신의 장지는 명나라 진린(陳璘) 도독의 처남이자 풍수사로 유명했고 이순신과도 교유했던 두사충(杜思忠)이 선정하였다고 전해진다. 1614년(광해 6)에 이순신의 묘는 북동쪽 직선거리 800m 정도의 현재 위치, 즉 어라산으로 이장하였으며, 초장지(初葬地)에는 나중에 이순신의 둘째 손자 이지석(李之晳)의 묘가 자리 잡았다.
[건립 경위]
위충암은 1599년 2월 11일에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산정리에 이순신의 유해를 안장하며 장례를 마친 뒤에 아산 지역의 유림들이 세웠다고 전해지지만, 그 정확한 건립 경위는 확인되지 않는다.
[위치]
위충암은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산정리 41-3번지에 있다. 국도 45호선[충무로]의 음봉교차로에서 북서쪽 400m 정도 지점의 갈림길인 음봉삼거리에 이르러 왼쪽의 아산온천 방향으로 300m 정도 간 뒤 오른쪽 샛길로 접어들어 200m 정도 가면 논과 산의 경계 지점인 산모롱이 길가에 있다. 이순신 신도비가 있는 이충무공 묘역 입구에서 북서쪽으로 직선거리 300m 정도가 된다.
[형태]
위충암은 자연석을 이용하여 조성한 표석이다. 자연 상태에서 편평한 전면의 가운데 약간 왼쪽에 ‘위충암(衛忠巖)’이라는 글자만 새겨져 있다. 전면은 북향이고 뒷면은 거친 자연석 상태이다.
[금석문]
위충암(衛忠巖)
[현황]
위충암은 세간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방치되어 수풀이 우거져 있었다. 2011년부터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하였고, 그 뒤 관심 있는 아산 지역 사람들이 찾아가 관리하고 있다. 최근에 경계석과 난간을 둘렀는데 공간이 협소하다.
[의의와 평가]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산정리에 있는 위충암은 1599년 2월에 이순신의 유해를 초장지 금산에 안장할 때 노제를 지냈던 곳이자 조문객을 맞이하였던 장소로 알려져 있다. 위충암을 조성한 사람과 정확한 건립 시기는 확인되지 않는다. 이순신의 장례와 관련된 뜻깊은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마지막 노제를 지냈다고 알려진 장소에 별도로 표석을 설치한 것은 그만큼 이순신의 죽음을 애통하게 여기고 그를 기리고자 했던 마음이 절실했음을 짐작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