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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덕충동에 있는 충민사를 중수 할 때 쓴 조선 후기 상량문. 충민사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모신 최초의 사액사당이다. 충민사 중수 상량문에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의 사당을 중수하는 이유를 밝히고 한산도 노량 해전에 함께 나아가 싸웠던 충무공 이순신과 보성군수 안홍국을 모심을 알리고 있다. 그리고 사당이 피폐해짐을 아쉬워하면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업적을 적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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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5년 전라남도 여수 지역에 있던 전라좌도수군절도사영에서 간행한 지리서. 『신호좌수영지(新湖左水營誌)』는 지리지의 작성과 별도로 표제 안쪽에 쓰여진 글귀를 통해 간행 시기를 확인할 수 있다. 지리지의 표제 안쪽에 “1815년(순조 15) 을해년에 읍지를 분장하였고, 70여 년이 지나 책이 손상되어 1884년(고종 21) 갑신년에 다시 개장하였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 기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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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율촌면 가장리에 있는 조선 후기 백자 도요지. 유문암이 도자기의 주원료로 사용됨에 따라 취적리·청대·신풍 산곡 저수지 부근 등 수암산 주변에 도요지가 분포된 것으로 판단된다. 가장리 도요지는 가장리 저수지에서 동남쪽의 도로를 따라 50m 떨어진 산의 사면에 위치한다. 도요지는 현재 석산의 개발로 인해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러나 작은 자기 조각이 흙더미 속에서 가끔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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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남면 횡간리에 있는 관우를 주향으로 모시는 조선 후기 사당. 관왕묘는 1730년(영조 6)에 세워졌다는 조사 보고서가 있으나 근거가 불확실하고, 임진왜란 이후 명나라의 원병과 관련해 조선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19세기 후반 관왕(關王)[관우 또는 관운장]을 모시면 좋다는 이야기를 들은 마을 사람들이 관우의 초상화를 각자의 집에 마련해 제사를 모셨는데,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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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 죽포리 봉덕초등학교에 있는 조선 후기 석탑. 금백암지 삼층석탑은 돌산읍 죽포리 뒷산에 있었던 김백암의 폐사지에 있었다. 폐사지에 있었던 탑을 돌산 봉덕초등학교 자연체험학습장 수조 앞 화단 모퉁이에 옮겨놨다. 이종범은 『여수시의 문화유적』에서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였으나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는 주장도 있다. 언제, 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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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전라남도 여수 출신의 문장가. 거문도(巨文島)는 김류와 같은 대문장가가 태어난 고장이라 하여 클 거(巨), 글월 문(文)으로 섬 이름을 삼았다고 전한다. 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귤은(橘隱). 김류의 집안이 거문도 지역에 자리를 잡은 것은 7대조 김호은(金湖隱)이 난세를 피하여 거문도의 동도 지역에 입도하고서부터이다. 할아버지는 김정택(金鼎宅), 아버지는 김지관(金志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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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화양면 화동리에 있는 조선 후기 곡화목장 감목관 김시좌의 선정비. 김시좌 선정비는 화양면 화동리 여수화양고등학교 교문 앞 느티나무 숲에 있다. 고인돌의 덮개돌을 다듬어서 마애비로 석각을 하였다. 고인돌의 덮개돌 하나에 3기 감목관 정현 선정비와 감목관 송유식 선정비, 감목관 김시좌 선정비를 같이 새겼다. 비신의 높이는 110㎝이고, 너비는 40㎝이다. 바위[고인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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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전라남도 여수 지역에서 활동한 무신. 김영수(金永綬)는 1744년(영조 20)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김해부사(金海府使)로 있다가 1773년(영조 49) 전라좌도수군절도사로 임명을 받아 여수로 왔다. 이 때 좌수영성을 개축하고 전함을 보수하는 등 진력을 다하였다. 또, 수성장병(守城將兵) 600명, 성정(城丁) 800명, 승군(僧軍) 300명을 증설하고 수만금을 들여 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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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군자동의 진남관 앞 비각 안에 있는 조선 후기 비석. 여수시에는 도치뿔샘[공화동에 있는 큰 샘]과 큰샘[군자동 남쪽에 있는 큰 샘]이라고 불리는 큰 샘 두 곳이 있다. 이 중 정확히 어느 샘을 파고 나서 대정서변립비(大井西邊立碑)를 세웠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현재까지 군자동 아래에 남아 있는 샘을 큰샘이라 부르며, 주변 지역을 큰샘골이라고 부르는 등의 정황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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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라남도 여수시 관문동에 있던 연못. 「영성도(營城圖)」에는 동문과 동문(東門) 좌포루(左鋪樓) 사이에 연못과 성곽 아래로 수구(水構)를 내어 천수(川水)로 흘러가는 것으로 그려져 있는데, 이 물길은 성곽을 따라 판 해자(垓字)와도 연결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호좌수영지(湖左水營誌)』의 기록에 의하면 1773년 3월 김영수가 물이 솟을 만한 곳을 가려 민가를 헐어서 연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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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전라좌수영 내에 있던 공창. 1721년(경종 1) 절도사 박세정(朴世梃)이 창건하였다. 『호좌수영지(湖左水營誌)』에 따르면 도무창은 13칸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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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상암동에 있는 암자. 도솔암은 불교에서 부처로 태어나기 위해 거쳐야 되는 곳, 즉 도솔천에서 비롯한 명칭으로, 기도 발원을 많이 하는 암자이기도 하다. 여러 자료에 의하면 흥국사에 속한 암자는 열네 곳이나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도솔암 한 곳만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도솔암이 언제 지어졌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1759년에 제작된 흥국사 괘불탱화 후면의 시주질에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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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고소동에 있는 ‘여수 통제이공 수군대첩비’를 세우게 된 내력을 적은 조선 후기 기실비. 현감 심인조(沈仁祚)가 ‘여수 통제이공 수군대첩비’의 건립 경위와 여기에 참여한 인물들, 그리고 건립하기까지의 어려움 등을 상세히 기록함으로써 후세에 충무공 이순신을 숭모하는 정신을 전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장방형 비신 뒷면 음기에 "숭정기원후주갑무술인정일립(崇禎紀元後周甲戊寅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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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 죽포리에 있는 조선 후기 다리. 마주교는 1666년(헌종 12)에 마을 주민 김석휴 등 8명이 중심이 되어 주민들의 편익을 위해 만들어졌다. 큰 돌을 놓아 만들었다고 하여 독다리로 불리기도 한다. 1973년 새마을사업으로 복개되었다. 다리의 아랫부분은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동쪽에는 다리를 설치하면서 판 우물이 있다. 마주교 옆에는 다리를 만든 8명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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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좌수영 내에 있던 공창. 보군창(補軍倉)은 1673년(현종 14)에 절도사 원상(元相)이 창건하였고, 1767년(영조 43) 절도사 김종만(金鍾萬)이 중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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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시전동 여천 선소 유적 내에 있는 임진왜란 때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배를 매어 두는 돌기둥. 선소 계선주는 높이 약 1.4m의 돌기둥 형태이며, 선소 유적 안에 복원된 세검정(洗劍亭) 건물 앞 바닷가에 세워져 있다. 『난중일기(亂中日記)』에 의하면, 임진왜란 중에 선소가 생겼다고 한다. 계선주는 이때 선소 내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계선주는 거북선과 판옥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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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7년(인조 25) 작성된 전라좌수영 관할 선소 수군 무기고 현황이 담긴 고문헌. 『선소수군기반열책(船所水軍器班閱冊)』은 1647년(인조 25) 5월 전라좌수영 관할 내의 순천도호부[현 여수시 시전동] 소속 선소 수군들 중 무기고를 담당하던 군기관들끼리 무기류를 인수·인계하면서 그 결과를 기록하고 전라좌도수군절도사에게 결재를 받은 문서이다. 이임 군기관은 서의득·정감손이고 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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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전라남도 여수 지역에서 활동한 무신. 성윤문(成允文)은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하여 충청도수군절도사와 평안도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한 무신이다. 여수 지역에 후손이 많이 살고 있다.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정노(廷老), 호는 만휴(晩休). 아버지는 판서 성효원(成效元)이다. 성윤문은 1542년(중종 37) 순천부 해룡면 소안리[현 전라남도 순천시 해룡면 대안리]에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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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중앙동 선창에 있었던 돌로 쌓아 선박을 대피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만(灣)처럼 굽어 있는 구조물의 터. 수장은 1592년 조선 후기 숙종 때 수사 윤하가 여수항의 큰 물결을 막을 목적으로 쌓은 구조물이다. 해안 가까이의 바닷속에 돌을 쌓아 만들었다. 『난중일기』 임진년 2월 1일에 “出船滄 點擇可用板子 時水塲內鯈魚雲集[선창에 나가서 쓸 만한 판자를 고르는데 때마침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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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0년 전라남도 여수시 흥국사 선당을 개축할 때 작성한 상량기. 선당 개축에 즈음하여 흥국사의 창건 및 임진왜란 이후의 중건, 그리고 이에 참여한 시주와 장인들의 면면이 잘 드러나 있다. 지금의 심검당의 본래 이름이 선당으로, 1812년 중건 과정에서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1560년 법수대사에 의해 대대적인 중창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최초로 건립된 것으로 추측된다. 임진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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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소라면 덕양리에 있는 조선 후기 수군절도사 신택희의 불망비. 여수시 소라면 덕양리 대로변에 있는 여감바위, 또는 역의암이라고 부르는 바위 위에 세워져 있다. 비신만 있다. 높이는 100㎝이고, 너비는 37㎝이다. 비의 앞면에는 "수군절도사신공택희영세불망비(水軍節度使申公宅熙永世不忘碑)"라고 기록되어 있다. 비석의 석질이 사암이라 마멸의 속도가 빨라 시멘트로 보전(補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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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 때 전라좌수사로 부임하여 거북선 복원과 구휼 ·제민에 힘썼던 인물. 가계와 생몰 연대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자는 성숙(聖淑)이요, 본관은 죽산이다. 안숙(安潚)의 행적은 『조선왕조실록』과 여수 연등동에 세워진 사적비 비문으로서 알 수 있다. 안숙은 행수선전관(行首宣傳官)을 거쳐 1797년(정조 21) 8월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800년 순조가 즉위하자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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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연등동에 있는 조선 후기 돌로 만든 장승. 벅수는 나무나 돌에 사람의 얼굴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몸통에 이름을 새긴 장승이다. 장승의 기능은 마을 수호신이나 이정표, 가람 수호신, 벽사(辟邪) 등 다양하다. 여수 지역에 분포된 벅수에는 ‘남정중(南正重)’, ‘화정려(火正黎)’라는 명문이 있어 지역성을 나타내고 있다. 중국 한(漢)나라 사마천이 쓴 『사기(史記)』역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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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군자동에 있는 조선 후기 전라좌수영의 객사. 1599년(선조 32) 정유재란으로 불타버린 진해루 터에 전라좌수사 이시언이 건립하였다. 1716년(숙종 42) 절도사 이여옥 때 큰 화재로 소실되었던 것을 1718년(숙종 44) 이제면 수사가 중창하였다. 1911년에는 여수공립보통학교로 사용하였고, 2001년 국보 제304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15칸[54.5m], 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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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호명동에 있는 방풍림. 여수 호명동 방재림은 바닷바람으로부터 농지를 보호하기 위하여 방풍림으로 심은 것으로 보인다. 한편 전하는 말에 의하면, 호명동은 지형이 풍수지리적으로 호랑이 모양이지만 꼬리가 없어서 보완책으로 마을 사람들이 호랑이 꼬리 모양으로 기다랗게 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여수 호명동 방재림 나무의 수령은 대부분 100~200년 정도이고, 가장 오래된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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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흥국사 대웅전 후벽에 그려진 조선 후기 백의관음벽화. 조성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며 몇 가지 사실로 추정할 뿐이다. 대웅전이 1690년에 건립되고, 후불탱화가 1693년에, 괘불탱화가 1759년에 완성되었으므로 대체로 1760년 이후 작품으로 볼 수 있다. 1780년에 쓰여진 『선당수습상량기』에 ‘전행팔도도승통가선육만(前行八道都僧統嘉善六萬)’이라는 기록이 나오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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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흥국사 대웅전에 봉안된 조선 후기 삼장탱화. 삼장탱화(三藏幀畵)는 상계(上界)를 담당하는 천장(天藏) 보살, 음부(陰府)를 담당하는 지지(地持)보살, 지옥을 담당하는 지장(地藏)보살과 그 권속을 그린 탱화이다. 대웅전에 전시되었던 것을 의승수군유물전시관으로 옮겨 전시했었다. 현재는 대웅전 후불탱화인 영산회상도의 향좌측 벽에 지장보살탱이 봉안되어 있다. 불화는 천장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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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중흥동 흥국사 의승수군유물전시관 2층에 전시된 불화. 흥국사는 18세기 전반에 사세가 융성하고 대대적인 중수 불사를 하면서 당시의 대표적인 화승(畵僧) 의겸(義謙)과 그의 제자 긍척(亘陟) 등 많은 화승이 제작에 참여했다. 제석도(帝釋圖)란 제석천(帝釋天)[수미산 꼭대기에 있는 도리천의 임금으로, 사천왕과 32천을 통솔하면서 불법과 불법에 귀의하는 사람을 보호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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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중흥동 흥국사에 있는 조선 후기 불전. 팔상도(八相=捌相)는 불교의 창시자이신 석가여래의 일생을 크게 8가지로 구분해서 도설한 그림이다. 팔상전은 법화신앙이 행해졌던 사찰에 많이 지어졌는데, 석가모니불을 주존으로 모시고 그의 일생 모습을 8폭의 불화로 그려 모신 전각이다. 「흥국사사적기」에 의하면 팔상전은 1624년 계특대사가 창건했던 대웅전을 1690년 통일대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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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연등동에 있는 조선 후기 전라좌수사 안숙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적비. 여수 절도사 안공 사적비는 1823년(순조 23)에 세운 것으로, 1809년(순조 9) 절도사(節度使)로 부임한 안숙은 문무를 권장하고 좌수영을 수리하여 주민들의 구제에 심혈을 기울였고, 부하 군졸을 가족처럼 여겼다. 또한 서민의 혼례, 장례 등 길흉사를 돕는 등 선정 정치의 모범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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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연등동에 있는 조선 후기의 사적비. 1779년(정조 3) 지방의 군사들과 의승(義僧)들이 뜻을 모아 세운 것으로, 호남좌수사로 부임한 김영수(金永綬)가 좌수영성을 대대적으로 개축, 보강하고 군사를 정비하였다. 또한 군기, 잡물 등을 마련하고 월과미(月課米) 및 정조(正租) 등을 마련한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비신은 방형의 머릿돌을 갖추고 있다. 높이는 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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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9년 전라남도 여수시 흥국사의 봉황대루 중창 과정에서 제작된 상량문. 「영취산 흥국사 봉황대루 중창 상량문」은 흥국사의 봉황대루를 중창하는 과정에서 제작되었다. 흥국사 봉황대루는 1646년에 창건되어 300여 명의 승군을 포함한 700여 명의 전체 대중의 집회 장소로 이용되었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729년 팔도도총섭 덕린과 자헌, 승통대장 찬민 등 300여 명의 승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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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2년 전라남도 여수시 흥국사의 심검당 중창 과정에서 제작된 상량문. 「영취산 흥국사 심검당 중창 상량문」은 흥국사의 심검당(尋劍堂)을 중창하는 과정에서 제작되었다. 1988년 심검당 건물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심검당은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지혜의 칼을 찾는 곳이라는 뜻이다. 원래의 이름은 선당(禪堂)이었으나, 1812년 중창 과정에서 바뀌었다. 1560년 법수대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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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3년 전라남도 여수시 중흥동에 있는 흥국사 적묵당을 중건할 때 작성한 상량문. 중창자인 효암(孝庵) 충감(充鑑)이 직접 짓고 쓴 상량문이다. 적묵당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맞배 및 팔작지붕을 혼용한 건물로서 대웅전 오른쪽에 위치하며 요사채로 쓰인다. 건너편의 심검당과 마당을 두고 마주 서 있다. 원래의 용도는 선방으로, ‘본래부동의 마음자리’를 의미하는 적묵, 그것을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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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웅천동에 있는 조선 후기 이순신과 압해정씨 창원맥의 4충신을 모신 사당. 사충사는 원래 가곡사(佳谷祠)라 하였다. 가곡사는 1847년(헌종 13)에 정재선(丁載璿)이 유림의 지원을 받아 정철(丁哲)에게 충절공(忠節公)이란 시호가 내려진 것을 기리기 위해 가곡마을에 세웠다. 통훈대부 행 종부사주부 정창협(丁昌夾)[1798~1875]이 상량문과 예성축문을 지어 21년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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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 19세기 말에 정선군수(旌善郡守), 자인현감(慈仁縣監), 함안군수(咸安郡守), 고성부사(固城府使), 공상소감동(工桑所監董), 지도군수(智島郡守), 여수군수(麗水郡守) 등을 역임한 학자이며 문신이다. 19세기 말에 정선군수(旌善郡守), 자인현감(慈仁縣監), 함안군수(咸安郡守), 고성부사(固城府使), 공상소감동(工桑所監董), 지도군수(智島郡守), 여수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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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전라남도 여수 출신의 항일운동가. 원세학은 1858년 2월 19일 삼산면 덕촌리에서 출생하였다. 무과에 급제하여 제주수문장을 지냈으며, 1914년 임병찬의 유배 생활 도중에 이루어진 어린이 교육을 도왔다. 임병찬은 구한말 독립의군부를 결성하여 항일운동에 앞장섰고, 그 결과 1914년 음력 6월 1일 감금형을 받아 원세학이 있던 거문도로 유배되었다. 임병찬의 유배 생활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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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군자동에 있는 조선 후기 전라좌수사 유광로의 선정비. 장방형의 비좌 위에 세워진 철비로, 옥개가 가지 모양을 하고 있으나 왼쪽 가지는 부러진 상태이다. 비의 앞면에 "수사유공광로청덕선정비함풍사년십이월일영내(水使柳公光魯淸德善政碑咸豊四年十二月日營內)"라고 쓰여 있다. 철제로 된 비이지만 비교적 보존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부정 부패가 극심했던 철종 때 세워진 청덕선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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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전라남도 여수 지역에서 활동한 무신. 본관은 진주(晉州). 증조할아버지는 정유재란 때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과 함께 노량해전을 승리로 이끈 유형(柳珩)이다. 유성채(柳星彩)는 무과에 급제하여 1685년(숙종 11) 12월 인동도호부사(仁同都護府使)로 부임하던 중 1686년(숙종 12) 9월 부친상을 당하여 교체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1696년(숙종 22) 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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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전라남도 여수 지역에서 활동한 무신.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사온(士溫), 호는 석담(石潭). 할아버지는 유진동(柳辰同)이고, 아버지는 경원부사 유용(柳溶)이며, 어머니는 선산 임씨(善山 林氏)이다. 유형(柳珩)은 1566년(명종 21) 태어났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의사 김천일(金千鎰)을 따라 강화도[현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에서 활동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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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화양면 화동리에 있는 조선 후기 감목관 윤동계의 선정비. 고인돌의 덮개돌에 선정비를 새겼다. 비의 높이는 100㎝이고, 너비는 40㎝이다. 비의 앞면에는 "행감목관윤후동계선정비무술팔월(行監牧官尹侯東啓善政碑戊戌八月)"이라고 쓰여 있다. 비석이 있는 곳에 고인돌을 보호하기 위한 울타리를 둘러서 비교적 관리가 잘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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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7년 전라남도 여수시 은적암을 중창할 때 작성한 상량문. 1656년(효종 7) 영변이 화주가 되어 중창한 은적암[현 은적사]이 무너지자, 그 파재를 모아 1777년(정조 1) 정월 수군절도사 최도민의 시주로 다시 중건하면서 쓴 상량문이다. 당시의 본진사도주(本鎭使道主) 수군절제사(水軍節制使) 최도민(崔道敏)이 시주하고 전별장(前別將) 옥필흥(玉弼興) 및 박세보(朴世輔) 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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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1년 전라남도 여수시 은적사의 칠성각 및 산제각을 재건할 때 작성한 상량축사. 은적사 칠성각 안에 액자 형태로 보관되어 있다. 한지 위에 쓴 묵서이며 글쓴이는 오승조이고, 화주는 황욱이다. 「은적암 칠성산신각 중건상량축사」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승평여수방답진동은적암칠성산제각중건상량축사(昇平吕水防踏鎭東隱寂菴七星山祭閣重建上樑祝辭) 유암즉보조국사게석지소만성생영치성지처야(唯菴卽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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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군자동에 있는 조선 후기 전라좌수사 이도빈의 선정비. 이도빈은 1644년(인조 22) 여수 진남관을 개축하였던 인물로, 『하멜표류기』에도 기록이 남아 있다. 이도빈이 전라좌수영의 수사로 재임하면서 베풀었던 공적을 추모하기 위하여 좌수영의 백성들이 세웠다. 방형의 대좌 위에 장방형의 비신을 세우고 그 위에 옥개석을 올렸다. 옥개석에는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놓고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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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전라남도 여수의 전라좌수영에서 활동한 무신.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의숙(儀叔). 충무공 이순신의 5세손이다. 죽산안씨와 달성서씨를 아내로 맞아 각각 이한필(李漢弼)·이한익(李漢翊) 두 아들을 두었다. 아버지 이홍저(李弘著)는 상주진영장겸토포사(尙州鎭營將兼討捕使)를 지냈고 호조참판에 추증(追贈)되었으며, 할아버지 이광윤(李光胤)은 현릉참봉을 지냈고 사헌부대사헌에 증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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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군자동에 있는 조선 후기 전라좌수사 이봉상의 선정비. 이봉상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5세손으로서, 1709년 3월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후 곡창을 설치하여 곤궁한 백성을 구휼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혼례비와 장례비를 제공하는 등 백성들에게 많은 혜택을 베풀었다. 1710년 퇴임 후 이봉상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장방형 지대석에 탑신을 세우고, 그 위에 지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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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전라남도 여수에서 선정을 베풀었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字)는 명서(鳴瑞), 호는 은봉(隱峯). 1640년 지평을 지낸 이완(李完)의 첫째아들이다. 이봉징은 1675년(숙종 1)에 증광시(增廣試)에 장원하여 수찬(修撰)·사인(舍人)을 거쳐 1688년(숙종 14) 순천부사(順天府使)를 제수받았다. 순천이나 여수가 전라좌도수군절도영이 율촌에 밤이 많다 하여 세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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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군자동에 있는 조선 후기 함은군 이삼의 불망비. 장군도에 방왜축제를 축조했던 이량 장군의 8세손으로, 1710년(숙종 36)에 전라좌수사로 부임하면서 선정을 베풀어 주민들이 이를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이다. 단순한 비좌 위에 비신이 세워져 있으며, 비갓에는 소박한 구름 무늬가 새겨져 있다. 비의 높이는 168㎝이고, 너비는 51㎝이다. 비의 앞면에 "함은군이삼거사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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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소라면 덕양리에 있는 조선 후기 순천부사 이종의 불망비. 소라면사무소에서 대포 쪽으로 가는 덕양역 부근 도로변 여감바위 위에 수군절도사 신택희 영세불망비와 나란히 서 있다. 단순한 형태의 좌대와 훼손이 심한 상태의 비갓이 올려져 있다. 비의 높이는 173㎝이고, 너비는 65㎝이다. 비의 앞면에 "행부사이후종영세불망비(行府使李侯宗永世不忘碑)"라고 쓰여 있다. 비바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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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 장군이 전라남도 여수 지역에 어머니와 가족을 피난시킨 거처. 이충무공 어머니 사시던 곳은 이순신 장군의 어머니 변씨 부인이 임진왜란 때 5년 동안 머물렀던 곳이다. 이순신 장군이 쓴 『난중일기』에는 노모에 관한 기록이 88일 분이나 있어 그 효성을 짐작하게 한다. 특히 『난중일기』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3년째인 갑오년 정월 노모와 설을 같이 지내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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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 군내리에 있는 조선 후기 방답첨사 장익복의 선정비. 단순한 좌대 위에 비갓 없이 비신만 있다. 높이는 100㎝이고, 너비는 37㎝이다. 비의 앞면에는 "첨사가선대부장공익복영세불망비(僉使嘉善大夫張公益福永世不忘碑)"라고 쓰여 있다. 바닷가에서 해풍을 맞으면서 풍화가 진행되고 있다. 방답진(防沓鎭)의 첨사에 관한 유일한 비석으로 방답첨사 장익복의 행적을 알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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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영취산에 있는 조선 후기 흥국사의 사적기. 1691년 통일대사가 대웅전 등을 중창하면서 불일 보조국사가 흥국사를 창설한 내력을 기록한 사적기이다. 나무로 된 두 장의 목판으로 앞뒷면에 글씨를 양각한 경판 형식이다. 이 경판은 1691년 승려 통일이 대웅전을 중창하면서 창사 이래 흥국사의 중요한 자취를 목판에 새긴 것이다. 목판은 전후면에 각 1장씩 판각되어 총 2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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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웅천동에 있는 조선 후기 충신 정계생의 신도비. 사충사에 봉안되어 있는 임진왜란 공신인 정철, 정린, 정춘, 정대수와 그의 부친 정계생의 가계와 신상을 살필 수 있는 비이다. 금석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故月川丁公歿三百餘年至哲宗壬戌에 始贈公吏曹參判하고 高宗甲子에 又加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判義禁府事弘文館直提學하니 於法에 得竪碑神道而後孫이 久以孱力未遑이러니 今其遺裔龍洙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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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웅천동에 있는 조선 후기 무신 정대수의 신도비. 정대수(丁大水)는 자는 여숙이고 호는 용서(龍西)며 1565년에 웅천 송현마을에서 증 호조참판 정호인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대사성 정득우의 9대손이고 월천공 정계생의 증손으로 정철, 정춘, 정린의 종질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 휘하의 별장으로서 노량해전 등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당진현감에 임명되었으나 취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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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3차 여수의 복현 운동에 결정적으로 역할을 했던 인물. 정종선의 호는 운초(雲樵)이며, 본관은 창원이다. 여수는 조선초기 순천부에 복속이 된 이래 두 번이나 복현의 기회를 맞았으나, 두 번 다 다시 폐현의 운명을 맞게 된다. 이에 1864년 정종선이 세 번째로 복현상소문을 올려 조정을 감동케 했다. 정대수의 후손이다. 어려서부터 경사에 능통했고 20세에 소과에 합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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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화양면 화동리에 있는 조선 후기 감목관 정현의 선정비. 화양면 화동리 여수화양고등학교 입구에 세워져 있다. 고인돌의 덮개돌에 선정비를 새겼다. 비의 높이는 100㎝이고, 비의 너비는 40㎝이다. 비의 앞면에는 "행감목관정후현선정비무술팔월(行監牧官鄭侯鉉善政碑戊戌八月)"이라고 쓰여 있다. 비석이 있는 곳에 고인돌을 보호하기 위해 울타리를 둘러서 비교적 관리가 잘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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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좌수사가 되어 여수에서 선정을 베풀었던 인물. 조대는 전라좌수사가 되어 여수에서 선정을 베풀었던 인물이나 자세한 가계와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조선환여승람』에 곡식을 풀고 학문을 장려했다는 기록만 남아 있다. 1797년(정조 21)에 전라좌수사로 부임하여 양곡을 풀고 돈을 지급하여, 궁핍한 구민 구호에 주력했으며 또한 학문을 권장하는 선정을 베풀었다.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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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전라남도 여수 지역에서 활동한 문신. 갑산부사(甲山府使)와 승지를 역임한 조문현(趙文顯)은 1869년(고종 6) 4월 당시 전라좌도수군절도사로 여수에 부임하고 있었다. 이 때 광양에서 민회행(閔晦行)·전찬문(田贊文)·한경삼(韓敬三) 등이 부하 70여 명을 거느리고 난을 일으켜 공당(公堂)을 파괴했으며, 광양현감을 내쫓고 공금(公金)을 탈취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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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군자동에 있는 조선 후기 전라좌수사 조문현의 선정비. 조문현의 전직은 승지(承旨)로 1869년에 절도사로 여수에 부임하였다. 부모를 모시듯 군사와 백성을 사랑하고 아껴 관내 백성들이 모두 감격하여 그를 생불(生佛)이라고 불렀으며, 이임 후 선정비를 세웠다. 여수시 군자동 여수 진남관 입구의 비각 안에 있다. 형식적으로 조각한 조잡한 귀부 위에 철제로 된 비신을 세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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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라좌수영 내에 있던 공창. 『호좌수영지(湖左水營誌)』에 따르면 주사창은 8칸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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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 죽포리 마주교 옆에 있는 조선 후기 비석. 1666년(헌종 12) 김석휴 등 마을 사람들이 만재석교(또는 마주교)를 만들었다. 만재석교비는 당시의 마을 주민들이 다리를 만든 사람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비는 오랜 풍상으로 인해 글씨 등이 많이 마멸되어 1961년에 재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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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에 있는 차원부의 유고 문집 『차문절공유사』를 새긴 조선 후기 목판. 차원부(車原頫)[1320~1407]는 고려 말 조선 초의 학자로 본관은 연안, 자는 사평(思平), 호는 운암거사,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올라 간의대부(諫議大夫), 보문각(寶文閣) 제학(提學) 등을 역임했으며, 역학에도 밝았다. 조선 개국공신 하륜 등과의 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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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전라좌수사가 되어 여수에서 학문을 장려했던 인물. 최완은 전라좌수사가 되어 여수에서 쿤 공을 세웠던 인물이나, 자세한 가계와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조선환여승람』에 학문 장려의 치적이 있어 비를 세운 내용만 보일 뿐이다. 최완은 1720년(숙종 46)에 전라좌수사로 부임하여 여수의 동쪽에 동서재(東書齋)를, 서쪽에 서서재(西書齋)를 세우고 학문을 장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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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군자동에 있는 조선 후기 전라좌수사 최완의 청덕비. 전라좌수사 최완은 1720년(숙종 46)에 부임하여 여수의 동쪽에 동서재(東書齋)와 서쪽에 서서재(西書齋)를 세우고 학문을 장려하였다. 제주목사로 전임하자 고장 백성들이 청덕비를 세워 그의 공을 기렸다. 여수시 군자동 여수 진남관 입구 비각 안에 있다. 개석은 없어지고 비신이 장방형의 비좌 위에 서 있다. 비의 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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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덕충동 충민사 입구에 있는 조선 중기에 건립된 하마비. 1603년(선조 36) 충민사(忠愍祠)가 이순신 사액사당 1호가 되었다. 궁궐이나 사찰 및 성균관, 사당 등 예를 갖추어야 하는 곳에는 하마비를 설치하였다. 하마비는 충민사에 올 때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여기서부터는 누구나 말에서 내려 경건하게 예를 갖추라는 의미로 세워진 비이다. 전라남도 여수시 덕충동 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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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율촌면 취적리에 있는 조선 후기 백자 도요지. 수암산에 있는 투구봉 동쪽으로 구릉 정상에 당산나무가 있다. 여기서부터 서쪽 산등성이를 따라 만들어진 소로를 따라 500여m 정도 내려가면 소로와 인접한 산록에 광산이씨 이영호의 묘가 있다. 취적리 도요지는 이 묘역 주변에 위치한다. 도요지는 현재 파괴된 상태이며, 깎아낸 산의 단면과 길 양옆에서 적은 양의 백자 조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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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한산사에 있는 조선 후기 동종. 한산사는 구봉산(九鳳山)[388m] 중턱에 자리한 화엄사의 말사로 고려 명종 때 보조국사 지눌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임진왜란 당시 수군과 의승군이 주둔하였던 호국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경내의 동쪽 바위 사이로 흐르는 약수는 시원하고 맛이 좋기로 유명하다. 한산사에서는 1750년(영조 26) 한산사 종을 주조한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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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라좌수영 내에 있던 공창. 1664년(현종 5)에 세워진 건물로 수용군에게서 수취한 액수와 사용처를 적어 놓았다. 해현창은 17칸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전라좌수영 남북의 동선 동측에 위치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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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남도 여수 지역에서 활동하다 귀국하여 조선을 서양에 소개한 네덜란드 선원. 헨드릭 하멜(Hendrick Hamel)[1630~1692]은 우리나라를 최초로 서방에 소개한 인물로 네덜란드 호르큼 사람이다. 17세기 전반에 네덜란드는 열대 농작물과 동남아산 향료, 차, 칠기, 비단, 도자기, 면직물을 거래하려고, 인도나 일본, 대만 등지에 거래처를 둔 동인도회사(VO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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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화양면 화동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백야곶목장[곡화목장] 감목관들의 선정비. 화양면 화동리 여수화양고등학교 앞 도로가의 느티나무 숲에 있다. 비의 형식을 갖춘 비석 입비(立碑) 3기는 도로가에 나란히 세워져 있다. 향좌로부터 높이 130㎝, 폭 40㎝의 "행감목관구후준원구민선정비(行監牧官具侯駿遠救民善政碑)", 높이 110㎝, 폭 40㎝인 "행감목관김후학례영세불망비(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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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남면 횡간리에 있는 조선 후기 전라좌수사·군관·순천부사·방답첨사 등이 남긴 각석문. 횡간도 놀이청 각석문이 위치한 곳은 계단식으로 된 50평 정도의 암반을 이용하여 건너편 돌산읍 금성리에 있는 해안굴을 과녁 삼아 활을 쏘는 지방관원들의 연마장으로 전해오고 있다. 또한 고관들의 놀이터 역할도 겸했다고 하여 지방민들은 놀이청으로 부르고 있다. 횡간도 놀이청 각석문은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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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삼산면 거문리에서 전해 내려오는 박윤하의 효행에 관한 이야기. 1805년에 거문도에서 출생한 박윤하(朴潤夏)는 어려서부터 천성이 온순 후덕하고 특히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거문도 주민의 총애를 받고 자라났다. 박윤하의 부친이 병이 들어 자리에 눕게 되었으며, 사경을 헤매던 부친이 전복을 먹고 싶다고 하자 박윤하는 바닷가로 나갔다. 그러나 파도가 너무 거세어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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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흥국사 의승수군 유물전시관에 있는 조선 후기의 공북루 편액. 사찰 배치 구조상 공북루가 있는 곳은 매우 드물다. 공북루는 성의 북쪽 문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북쪽의 성문은 북쪽에 임금이 있다 하여 공북이라 했다. 때문에 흥국사도 승병이 있었으므로 성문이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300여 년에 이르기까지 승병 조직이 있었기 때문에 성문이 있었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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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중흥동 흥국사에 있는 조선 후기 괘불대. 괘불이란 그림으로 그려서 걸어 놓은 부처를 가리키는데, 모인 신자가 많아 본전이 좁을 때 본전 앞마당에 불상 대신 괘불을 모시고 행사를 진행하는 데 사용된다. 괘불대는 이 괘불을 걸어 놓는 지지대를 가리킨다. 괘불을 걸기 위해 구멍이 뚫린 두 개의 깃대를 세우는데, 형태는 당간 지주와 비슷하다. 흥국사 괘불대 앞에는 세 쌍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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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흥국사 의승수군유물전시관에 전시(모사본/원본은 수장고보관)된 조선 후기 불화. 이 불화는 사찰에서 영산재(靈山齋)나 수륙재(水陸齋) 등의 큰 재를 올리거나 사월 초파일 등의 대법회(大法會) 때 사용한다. 또한 연등회(燃燈會)나 팔관회(八關會), 백고좌회(百高座會)시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실내 행사가 어려울 때 옥외 의식용(儀式用)으로 내거는 불화이다. 이때는 본존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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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흥국사 대웅전에 봉안된 조선 후기 영산회상도. 후불탱화(後佛幀畵)는 대웅전(大雄殿), 영산전(靈山殿), 팔상전(八相殿), 응진전(應眞殿) 등의 주존(主尊)인 석가불상의 뒷벽에 봉안하는 불화이다. 「흥국사 대웅전 후불탱」은 석가여래가 인도에서 영지 법회를 주재할 당시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법화경』의 내용을 도설화한 불화로 이를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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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중흥동 흥국사 대웅전 향좌에 있는 조선 후기 불전. 대웅전 향좌에 있는 전각이다. 다른 사찰에서 볼 때 그 중심불이 누구냐에 따라 붙여진 지장전(地藏殿)에 속한다. 지장보살(地藏菩薩)이 주불(主佛)로 되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유명계(幽冥界)의 심판관인 시왕(十王)이 봉안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을 시왕전(十王殿)[십왕전이라고 하지 않는다.]이라고도 한다. 그 왕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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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중흥동 흥국사 범종각에 있는 조선 후기 법고 대좌. 흥국사 법고 대좌는 범종각의 불전 사물 중 하나로 대형 법고를 받치고 있는 사자형 대좌이다. 법고 대좌에는 법고의 전체 하중을 받치는 대좌와 북을 높이 올려놓는 간주(竿柱)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있고, 간주 없이 대좌만으로 되어 있는 것이 있다. 일반적으로 해태상에 연잎 모양의 간주를 만들어 북을 받들게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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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중흥동 흥국사에 있는 조선 후기 당우. 흥국사 법왕문은 보제루[법당 대신 설법을 하기 위하여 지은 누각]의 기능을 했던 전각으로, 여기서부터 실질적인 법당으로 봐야 한다. 전면의 대웅전에 큰 괘불을 모셔 놓고 법회를 할 때도 이곳에 법단을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흥국사 윗보제루라고도 한다. 흥국사 법왕문은 대웅전 전면과 봉황루 후면 사이에 있다. 흥국사 법왕문의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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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중흥동 흥국사에 있는 조선 후기 누각. 흥국사의 천왕문과 법왕문 사이에 있다. 흥국사 봉황루는 1646년(인조 24) 창건되어 일반 대중의 집회 장소로 이용되었다. 임진왜란 기간에 불탄 것을 1729년(영조 5) 팔도도총섭인 승려 덕린(德燐), 승통대장(僧統大將) 찬민(贊敏), 팔도도총섭 자헌(慈憲) 등 300여 명의 승병이 중창하였다. 1729년 제작된 『영취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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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중흥동 흥국사에 있는 조선 후기 전각. 불조전은 주로 조사(祖師)들을 모시는 전각으로 원래는 흥국사의 암자인 청운암(靑雲庵) 경내에 있었다. 1759년(영조 35) 괘불 탱화를 모시던 때 괘불 후면에 기록된 자료에서 청운암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흥국사의 대웅전 왼쪽 뒤에 서 있다. 1630년(인조 8) 청파 대사가 청운암 경내에 창건하였다. 1820년(순조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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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5년 전라남도 여수시 흥국사 천왕문의 사천왕상을 중수할 때 작성한 기문. 흥국사 천왕문 및 사천왕상이 정확하게 언제 초창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단, 1805년 다 허물어진 천왕문을 보수하기 위해 벽파(碧波)·용운(龍雲)·영월(詠月) 등이 화주를 하여 보수했다는 내용이 기문에 전하는 것으로 보아, 최소한 그 이전에 건립되었으리라 추측할 뿐이다. 그 과정에서 이 기문도 함께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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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중흥동의 흥국사 영취교 앞 천왕문 내 사천왕상. 사천왕상은 천왕문 안에 있다. 사천왕은 자신의 권능으로 악을 정화하고 선을 유도함으로써 정법의 유통과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제석천 수하의 무장들이다. 동방은 악신(惡神)과 건달파(乾達婆)를 권속으로 하는 지국천왕(持國天王)이다. 남방은 귀신 구반다(鳩槃茶)를 권속으로 하는 증장천왕(增長天王)이다. 서방은 룡족(龍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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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흥국사에 봉안된 조선 후기 관세음보살탱화. 관음보살이 갖는 큰 특징의 하나는 자유자재로 몸을 바꾸어 나타나는 신통력을 갖는다. 설법을 듣고자 하는 자에게 알맞은 모습으로 나타나 법을 설하고 중생을 제도한다. 「흥국사 수월관음도」 하단에 “옹정원년계묘맹하전라좌도순천영취산흥국사관음전상단후불(雍正元年癸卯孟夏全羅左道順天靈鷲山興國寺觀音殿上壇後佛)”이라고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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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흥국사 응진당(應眞堂)에 봉안된 조선 후기 십육나한탱화. 응진당(應眞堂)에 있는 십육나한도로, 나한은 아라한이라고도 하는데 수행을 거쳐 깨달은 성자를 말한다. 십육나한탱화는 중앙의 영산회상탱은 없어지고 지금은 나한도 여섯 폭만이 남아 전해져 오고 있는데, 조선 시대 3대 불모(佛母 : 탱화와 같은 불화를 그리는 사람)인 의겸(義謙)의 작품으로 1723년(경종 3)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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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중흥동 흥국사에 있는 조선 후기 당우. 흥국사 응진당은 보물 제1333호로 지정된 「흥국사 십육나한도(興國寺 十六羅漢圖)」를 보관하고 있던 전각이다.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하고 좌우에 십육나한의 소상을 모시고 벽에는 「흥국사 십육나한도」를 봉안하였다. 흥국사의 대웅전 뒤편 팔상전 오른쪽에 자리하고 있다. 응진당은 나한당(羅漢堂)이라고도 하며 석가모니의 열여섯 제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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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중흥동 흥국사에 있는 당우. 흥국사 적묵당은 보살 대중방과 선방을 겸하는 공간이다 . 흥국사의 중심 공간으로 대웅전 오른쪽에 자리해 심검당과 마주 보고 있다. 「영취산 흥국사 적묵당 중창상량문(靈鷲山 興國寺 寂默堂 重創上樑文)」에 “……가경팔연계해오월이십이일술시상량벽택문인효암 충일근지(嘉慶八年癸亥五月二十二日戌時上樑碧澤門人孝庵充鎰謹誌).”라는 기록으로 보아 흥국사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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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5년 전라남도 여수시 흥국사 적묵당 중창시 기문을 적은 현판. 1805년 흥국사 적묵당을 다시 짓고 기록한 현판이다. 목판에 음각하여 목테를 두른 편액이다. 적묵당을 지을 때 소임들과 도편수 등의 목수들, 시주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사찰사뿐만 아니라 승군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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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중흥동 흥국사에 있는 조선 후기 일주문. 흥국사 진여문은 팔상전과 응진당을 출입하기 위한 문이다. 흥국사 대웅전에서 해동선관과 불조전 사이를 지나 부처의 공간인 팔상전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서 있는 문이다. 흥국사 진여문의 정확한 건축 시기를 알 수 있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도량주는 조선 후기 자연주의 사상에 입각한 건축 기법이다. 팔상전을 출입하는 문이라 팔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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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중흥동 흥국사에 있는 조선 후기 요사채. 해동선관은 시자(侍者)가 차를 달여 부처님께 공양하는 곳이라는 의미의 노전(爐殿)으로, 이곳에서 절의 대중들에게 시간을 알려 주기 때문에 첨성각(瞻星閣)이라고도 하였다. 흥국사 해동선관은 대웅전 오른쪽 바로 뒤편에 자리한다. 흥국사 해동선관이 언제 지어졌는지는 연원을 찾을 수 없다. 단지 건축 기법이 원통전과 매우 흡사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