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300011
한자 詩- 寧越- 金-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신성환

[정의]

강원도 영월군에서 성장한 김삿갓의 일화와 유적지를 바탕으로 영월 지역에서 추진된 다양한 문화콘텐츠.

[김삿갓의 삶과 영월]

별호인 김삿갓[김립(金笠)]으로 널리 알려진 난고(蘭皐) 김병연(金炳淵)[1807~1863]은 강원도의 역사적 인물 가운데 대중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김병연은 당대 최고의 벌열가문(閥閱家門)이었던 안동김씨(安東金氏)의 일원이었으나, 김병연이 다섯 살 때 일어난 홍경래(洪景來)[1771~1812]의 난으로 인생의 행로가 바뀌게 되었다. 김병연의 할아버지인 선천부사 김익순(金益淳)[1764~1812]은 반란군과 싸워 보지도 않고 항복하여 협조한 죄로 극악무도한 죄인에게나 내려지던 형벌인 능지처사(陵遲處死)를 당하였다. 이로 인하여 김익순은 역적의 대명사로 오명을 떨치게 되었으며, 김익순의 집안은 자손이 벼슬을 할 수 없는 폐족(廢族)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김병연의 집안은 폐족이 되자 뿔뿔이 흩어져 여주와 이천, 황해도 곡산 등지로 피신하였다가 1816년 어머니 함평이씨(咸平李氏)[1787~1829]가 아들들을 데리고 강원도 영월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이때가 김병연의 나이 열 살 때였다. 이후 김병연은 장수황씨(長水黃氏)[1806~1838]와 결혼하여 두 아들 김학균(金翯均)과 김익균(金翼均)을 낳는 한편, 부모와 형을 여의는 일을 겪었다[김병연의 아버지는 영월이 아닌 곳에서 생을 마감하였다고 전하여진다]. 김병연은 유년 시절부터 청년기까지 영월에 기거하면서 가족을 일구기도 하고, 또 가족들을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기도 하였던 것이다. 김병연이 방랑을 하게 된 계기에 대하여서는 학계의 의견이 분분하지만, 이러한 가족사가 일정 정도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방랑을 시작한 김병연은 더이상 영월로 돌아와 정착하여 살지는 않았다. 30여 년을 방랑객으로 떠돌다가 전라남도 화순의 어느 선비 집에서 삶을 마쳤다. 김병연이 죽고 몇 년 뒤 둘째 아들 김익균에 의하여 김병연은 영월로 돌아와 하동면[현 김삿갓면] 와석리 노루목에 묻혔다.

김병연을 ‘김삿갓’으로 만든 방랑의 시작도 영월이었으며, 기나긴 방랑의 끝에 영면에 든 곳도 영월이다. 즉, 영월은 ‘김삿갓’의 기점(起點)이자 종점(終點)인 셈이다.

[김삿갓 관련 일화]

『한국구비문학대계』에 수록된 구비문학 자료 중 제목에 ‘김삿갓’이 들어간 작품만 무려 68편에 이른다. 설화의 분포 또한 전국에 걸쳐 있다. 이뿐만 아니라 전근대 시기에 편찬된 야담집에서도 김삿갓과 관련된 일화는 쉬이 찾아볼 수 있다. 그만큼 김삿갓은 대중들에게 널리 사랑받았던 인물이며, 그 성격 또한 다채롭게 형상화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특징적인 몇 가지만 소개하기로 한다.

1. 〈김삿갓의 시로 장원급제한 사람〉

언젠가 김삿갓이 과거장에 가서, “글 사시오. 글 사시오.”하면서 외치고 돌아다녔다. 그러니까 어떤 선비가 글을 사겠다고 나섰다. 그러자 김삿갓이 “500냥짜리로 사겠습니까. 1,000냥짜리로 사겠습니다?”라고 물었다. 선비는 “기왕이면 1,000냥짜리로 사겠소.”라고 하였다. 그날의 시제는 “조인불감동하어(趙人不敢東河漁)”였다. “조나라 사람은 동쪽 강에서 고기잡이를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김삿갓은 선비에게 “어옹야방서암숙(漁翁夜傍西巖宿)”이라는 글 한 구절을 가르쳐 주고 돈도 받지 않고 홀연히 떠났다. 곧 “고기 잡는 늙은이는 밤에 서쪽 바위에서 잠자드라.”라는 뜻이었다. 선비는 김삿갓이 일러 준 글귀에서 힌트를 얻어 글을 잘 지어 장원급제하였다고 한다.

김삿갓은 과거에서 시제로 “논정가산충절사(論鄭嘉山忠節死) 탄김익순죄통우천(嘆金益淳罪通于天)”이 나오자, 가산군수 정씨를 예찬하고 선천부사이자 방어사이던 할아버지 김익순을 호되게 비판하는 글을 지어 장원을 하였는데, 이후 어머니로부터 집안 내력을 듣고 조상을 욕되게 한 죄인이라는 자책감에 방랑길에 나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일화의 진위 여부에 대하여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진위 여부를 차치하고 널리 알려졌다는 데 주목하면, 김삿갓이 그만큼 시를 잘 지었으며 동시에 ‘설화적’ 인물의 요소를 잘 갖춘 인물임을 보여 주는 일화이다. 위 설화에서도 김삿갓은 과거쯤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급제할 수 있는 인물로 형상화되어 있다. 이처럼 김삿갓 관련 일화의 대부분은 김삿갓의 작시(作詩) 능력과 관계되어 있다.

2. 〈기생 가련과의 사랑과 이별〉

김삿갓이 금강산을 구경하고 통천을 거쳐 안변에 이르렀다. 안변에서 시문으로 인연이 되어 1년간 고을 사또의 아들을 가르치는 독선생으로 들어앉게 되었다. 그때 ’가련’이라는 기생을 알게 되어 객지의 외로움을 달래었다. 그런데 예정한 1년이 다 되어 가련과도 이별할 수밖에 없었다. 김삿갓과 가련은 헤어지지 않을 수 없는 운명을 한탄하며 밤을 지새웠다. 오다가다 맺은 인연이었지만 1년이란 세월은 거미줄처럼 깊은 정을 얽어 놓았기 때문이었다. 아침이 되었다. “막상 길을 떠나자니 서글프구나, 붓을 주게.” 김삿갓은 가련이 넘겨 준 붓을 들어 먹물을 듬뿍 찍어 한지 위에 시를 썼다.

가련문전별가려(可憐門前別可憐)[가련의 문전에서 가련과 이별하니]

가련행객우가련(可憐行客尤可憐)[가련한 행객이 더욱 가련하구나]

가련막석가련거(可憐莫惜可憐去)[가련아 가련하게 떠남을 슬퍼 말게]

가련불망귀가련(可憐不忘歸可憐)[가련을 잊지 않고 가련에게 돌아오리]

가련은 이 시를 보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었다. 가련은 이토록 큰 사람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내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이 자기의 운명이 아닌가. 가련은 멀어져 가는 김삿갓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가슴에 품은 시를 부여안은 채 자리를 뜨지 못하였다.

이 이야기 역시 언어의 희화(戲畫)를 통하여 절절한 감정을 표현한 한시가 돋보인다. 이 한시는 김삿갓의 시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데, 가수 신중현이 「가련기시」라는 타이틀을 달고 곡을 붙인 이래 대중적으로 더 유명하여졌다. 떠나야만 하는 존재 김삿갓김삿갓을 좇을 수 없는 존재 기생 가련 사이의 이별은 남녀 사이의 이별을 넘어서는 존재론적 차원의 문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주목할 만하다.

3. 〈할머니로 둔갑한 여우를 알아보다〉

김삿갓이 고개를 넘어가는데 여우란 놈이 해골을 빡빡 긁고 있었다. 김삿갓이 앉아 유심히 보니 여우가 해골을 뒤집어쓰더니 백발노인으로 둔갑하여 마을의 환갑집을 찾아가는 게 아닌가. 그 집에서는 할머니가 오신다고 다들 맞아들이며 야단이었다. 김삿갓이 따라 들어가 좀 얻어먹고 백발노인더러 나오라 하였다. 하지만 백발노인이 나오지 않으려 버티자 김삿갓이 춤을 추고 돌아가다가 휙 자빠지면서 작대기로 노인을 때렸다. 그러자 백발노인이 꼬리 아홉 달린 구미호로 변하여 죽어 자빠졌다.

김삿갓 관련 일화의 또 다른 특징은 민중들의 문제를 해결하여 주는 해결사나 초월적 능력을 지닌 존재로서의 형상이 나타난다는 점이다.

김삿갓은 흔히 방외인(方外人)적 풍자 시인으로 일컬어지지만, 설화 속에 등장하는 김삿갓은 풍자 시인을 넘어 다양한 이미지를 발현하는 문화 영웅으로서의 면모가 두드러지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김삿갓의 이러한 면모는 영월군이 강원도 최초로 슬로시티(Slowcity)로 지정되는 데 핵심 콘텐츠로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슬로시티 김삿갓면]

슬로시티는 패스트푸드의 반대 개념으로 지역 고유의 전통 음식을 지키려는 모임인 슬로푸드(Slow food) 운동에서 출발한 ‘느린 도시’ 만들기 운동이다. 지역이 원래 갖고 있는 고유한 자원[자연환경·전통산업·문화·음식 등]을 지키는 것이자 동시에 지역민이 주체가 되는 ‘지역문화와 지역 경제 살리기 운동’이다.

강원도에서는 영월이 최초로 국제슬로시티로 지정되었는데, 그 배경에는 핵심 콘텐츠로서 ‘김삿갓(면)’이 자리한다. 영월군이 국제슬로시티로 지정될 수 있었던 것은, 천연기념물 영월 고씨굴을 비롯한 수려하고 청정한 자연경관이 잘 보존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비운의 임금인 단종(端宗)[1441~1457]과 조선 후기 방랑 시인이자 천재 시인 김삿갓 등 다양한 문화자원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문화자원을 보유한 데에서 그치지 않고 단종문화제김삿갓문화제 등을 통하여 다양한 문화자원의 가치를 널리 알리고 재생산하는 데 지속적으로 노력하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월은 박물관 고을 특구로서, 핵심 콘텐츠 지역인 김삿갓면에만 여덟 개의 박물관이 있다. 박물관 고을 육성 사업을 통하여서 지역 특성을 반영한 박물관을 유치하고 경쟁력을 강화하고 있으며, 인재 육성 및 활용과 네트워크 구축, 테마 체험 프로그램 및 문화 상품 개발 등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서 가치를 찾아내는 데 힘을 기울이고 있다. 이는 인간 사회의 진정한 발전과 미래를 위하여 지속 가능한 도시의 발전과 시민의 삶의 질 향상을 조화롭게 실현하려는 슬로시티의 목적과 부합한다고 할 수 있다.

[김삿갓 유적지]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와석리 노루목에는 김삿갓 묘소와 주거지, 문학관 등이 자리하고 있다. 방랑 시인이었던 김삿갓은 1863년 전라남도 화순의 어느 선비의 집에서 객사하였는데, 이후 둘째 아들 김익균이 김삿갓의 유해를 주거지인 노루목 골짜기로 옮겨 묻었다. 김삿갓의 묘소는 116년이 지나 1982년 영월의 향토사학자 박영국에 의하여 처음 세상에 알려졌으며, 이후 묘소 주변으로 공원을 조성하기 시작하였다. 집터의 주거지 건물 또한 이때 함께 발견되었는데, 2002년에 새로 복원하여 지었다.

이와 더불어 영월군에서는 강원도 시책 사업인 ‘강원의 얼 선양 사업’의 하나로 2003년 10월 난고김삿갓문학관[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와석리 913]을 개관하였다. 난고김삿갓문학관김삿갓의 생애와 문학 세계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김삿갓의 얼과 문화예술의 혼을 추모하고 문학적 가치를 재조명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한편 김삿갓 유적지 일원에서는 매년 9~10월, 김삿갓문화제가 열린다. 김삿갓문화제에서는 다양한 공연 행사는 물론 해학의 길 걷기, 인절미 떡메 치기 등 다채로운 체험 행사가 열린다.

[지명을 바꾼 김삿갓면]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은 고려 시대에는 밀주(密州)라 불렀으며 1698년(숙종 24)에 하동면(下東面)으로 명칭이 바뀌었고, 21세기까지 이어졌다. 영월군이 지역 관광 활성화를 위하여 2009년 10월 20일 하동면김삿갓면으로 개명함으로써 현재의 김삿갓면이 탄생하였다. 김삿갓면의 존재는 김삿갓이 과거의 인물이 아니라 현재에서 살아 숨 쉬는 인물임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지금까지 전하여지는 김삿갓과 관련된 자료와 이야기를 통하여 볼 때, 김삿갓은 전 생애에 걸쳐 사실과 허구의 양면성이 얽혀 있는 인물이다. 김삿갓의 한시에 대하여서도 조선의 다양한 희작시(戲作詩)들이 김삿갓의 이름 아래 묶여졌다는 뜻에서 “김삿갓은 없다”는 선언이 등장할 정도다. 이러한 김삿갓의 특징은 다양한 콘텐츠의 원형으로서 지속적인 창조 에너지를 제공하는 계기로 작동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김삿갓은 여러 사람들의 흥미를 유발하는 새로운 캐릭터로 재창조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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