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3000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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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武陵桃源面 - 邀僊契- 邀仙亭, 邀仙巖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강원도 영월군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이윤석 |
[정의]
무릉도원면은 강원도 영월군의 북서쪽에 있는 면(面)이다. 무릉도원면에는 적어도 300년 넘게 지속되어 온 지역민의 계(契) 조직인 요선계(邀僊契)가 있다. 20세기 초에 요선계가 중심이 되어 요선정(邀僊亭)을 세워 역사적 유물을 보존하려는 노력을 하였다. 요선계나 요선정의 명칭은 무릉도원면을 흐르는 주천강(酒泉江)의 아름다운 바위 요선암(邀僊巖)에서 따온 것이다.
[개설]
영월군 무릉도원면(武陵桃源面)의 원래 이름은 수주면(水周面)인데 문자 그대로 물로 둘러싸인 곳이라는 의미이다. 조선 시대에 수주면 지역은 영월군에 속한 곳이 아니라 주천면과 함께 원주목(原州牧)에 속하였다. 1905년 대한제국 시기에 주천면과 수주면이 영월군에 편입된 후 몇 차례 소소한 변동이 있었지만 대체로 현재의 경계가 유지되었다. 2016년 주민들의 의견에 따라 면의 명칭을 수주면에서 무릉도원면을 바꿨다. 무릉도원면이라는 명칭은 무릉리(武陵里)와 도원리(桃源里)에서 두 글자씩 따와서 합친 것이다.
강원도 횡성군의 태기산에서 발원한 주천강은, 영월군 무릉도원면으로 들어와 흐르다가 영월군 한반도면 옹정리 조야에서 평창강[서강]에 합류한다. 주천강 강가에서 가장 이름이 난 곳은 아마도 요선암일 것이다. 요선암은 사자산에서 발원한 법흥천(法興川)이 주천강과 합류하는 지점에 있는 갖가지 기이한 모양의 바위들을 말한다. 요선암은 무릉도원면 무릉리에 있다. 근처 요선정이라는 유명한 정자는 요선암에서 그 이름을 가져온 것이다. 요선정은 조선 시대 숙종과 영조 그리고 정조의 글과 글씨를 보존하기 위하여 지은 정자이다. 요선정과 요선정에 보관되고 있는 조선 시대 임금의 글과 글씨가 들어 있는 현판에는 흥미 있는 이야기가 얽혀 있다.
요선암이나 요선정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지역의 동계(洞契)[마을 사람들이 만든 계]인 요선계를 알아둘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요선정에 조선 시대 임금의 글과 글씨를 보관하려던 지역 유지들은 바로 요선계의 회원들이었기 때문이다.
[무릉도원면 사람들의 요선계]
무릉도원면에는 ‘요선계’라는 오래된 동계가 있다. 요선계가 만들어진 시기가 언제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1744년에 작성된 기록에 의하면, 1695년에 화재로 요선계의 창고와 마을에서 공동으로 사용하는 기구들이 불에 탔고, 또 1743년에 화재로 여러 가지 문서들이 타 버렸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적어도 1695년보다 훨씬 이전에 만들어진 것임은 분명하다. 현재 남아 있는 문서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744년에 작성한 것이다. 1744년 문서에 의하면, 요선계는 이 지역에 거주하던 원주이씨(原州李氏), 원주원씨(原州元氏), 청주곽씨(淸州郭氏) 세 성씨의 대표들이 요선암에 모여서 조직한 것이라고 한다.
1743년 화재 이후 1744년에 다시 작성한 문서를 보면, 요선계의 회칙은 35개항이다. 이 가운데 몇 가지 항목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⓵ 국가와 백성을 위하는 근본은 오륜(五倫)이며. 이것을 잘 지켜서 국가를 융성하게 하고, 백성을 편안히 하며, 가정을 안락하게 한다.
⓶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고, 자녀는 부모에게 효도하며, 부부가 화목하고, 동기간에 우애가 두터운 가정은 상을 주며, 그렇지 못한 가정은 벌을 준다.
⓷ 상과 벌을 공정히 하며, 큰 상과 벌은 관청에서 주도록 하고, 작은 상과 벌은 마을의 계원들이 모여서 상벌의 경중에 따라서 스스로 처리한다.
⓸ 마을에서 상을 받은 사람은 계원이 모여서 축하하여 주며, 마을의 모범인으로 존경하고 추앙하며, 마을에서 벌을 받은 사람은 계원들이 모인 가운데서 책임자가 당사자에게 그 자리에서 책망한다. 이에 불복할 때는 마을에서 일시적으로 추방하며, 그래도 개선되지 않을 때에는 동적부에서 제명하고 영원히 추방한다.
⓼ 앞에서 옳다고 하고 뒤에서는 비방하며, 다른 사람의 선행은 감추고 과실만을 들추어 내며, 작은 일에 논쟁을 벌이고 남을 중상모략하며, 유언비어를 조작하여 사회를 어지럽히는 자는 죄의 경중에 따라 처벌한다.
이와 같은 회칙에서 눈여겨볼 것은, ⓾번인데, “관혼상제(冠婚喪祭)에 필요한 장비와 기물을 준비하여 두고 일이 있을 때 이것을 사용하며, 계원이 아니거나 다른 동리 사람에게는 먼저 세를 받고 빌려준다.”라는 회칙이다. 이것은 요선계가 단순히 도덕적 당위만을 말하는 조직이 아니라, 계원의 상호부조와 아울러 기금을 확충하기 위한 방안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요선계는 오랫동안 이 지역에서 일정한 역할을 하였는데, 특히 20세기 초에 조선이 식민지가 된 이후에 요선정의 건립을 둘러싼 일련의 활동은 상당히 의미가 있는 일이다. 요선정의 건립 과정은 요선계 계원들이 어떻게 이 지역에서 일하여 왔는지를 잘 보여 준다.
[요선정]
요선정은 강원도 영월군 무릉도원면 무릉리 주천강 강변에 있는 정면 2칸 측면 2칸의 정자이며, 1913년 요선계 계원들이 지은 것이다. 요선정 건립의 경위를 이해하려면 숙종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조선의 제6대 임금 단종은 숙부인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영월로 유배되어 죽었다. 1698년(숙종 24) 오랫동안 왕이 아니라 노산군(魯山君)으로 불리던 단종이 복권되었다. 숙종이 단종을 복권시킴에 따라, 단종의 묘소도 임금의 묘인 장릉(莊陵)이 되었다. 단종이 복권된 지 60년이 지난 1758년(영조 34)에 예조판서 홍상한(洪象漢)이 영월 단종의 능을 살펴보고 와서 다음과 같은 보고를 한다.
“원주에 주천이라는 오래된 고을이 있는데 빙허루라고 있었습니다. 심정보가 원주목사로 있을 때, 경자년(1720) 1월 28일에 임금[숙종]께서 어시(御詩)와 술을 내려 보냈습니다. 그런데 계유년(1753)의 화재로 누각이 불타 없어지고 또한 어제시(御製詩)도 소실되었습니다. 지금 원주목사 임집이 바야흐로 이를 아뢰고 옛날 누각을 중건하고 다시 어제시를 걸어놓고자 합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영조는, 아버지 숙종이 쓴 시를 옮겨 쓰고 여기에 자신의 소회를 짧게 쓴 글을 덧붙여 주었다. 원주목사는 이 글을 받아 현판을 만들어 주천에 있는 빙허루에 걸어 두었다. 후에 정조 임금도 이 이야기를 듣고는 숙종이 지은 시에 차운(次韻)한 시를 지었다. 주천에서는 이를 또 현판으로 만들어 빙허루에 걸었다.
이렇게 빙허루에는 숙종이 지은 시와 여기에 덧붙인 영조의 글, 그리고 정조가 지은 시 등 세 임금의 글이 걸려 있게 되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난 1909년에 빙허루가 허물어져서 방치되면서, 이 누각의 재목과 어제시 현판을 당시 주천의 헌병파견소의 소장이던 일본인이 약간의 돈을 주고 구입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요선계의 계원들은, 새로 정자를 지어 일본인에게 넘어간 어제시 현판을 도로 찾아서 걸어 놓기로 하였다. 요선계 계원들은 1913년 무릉리에 요선정을 짓고, 일본인과 교섭하여 어제시를 도로 찾아 요선정에 걸게 된다.
그런데 1928년 주천면에서는 빙허루를 다시 지었다. 그리고 여기에 어제시 현판을 걸어야 하니 어제시 현판을 돌려달라고 요선계에 요구하였으나 요선계에서는 이 요구를 거절하였다. 거절한 이유는, 주천면에서는 빙허루의 재목과 현판을 일본인에게 매각하였으므로 권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주천면에서는 면장을 중심으로 당시 총독부나 이왕직(李王職) 사무실 등에 협조를 요청하여 현판을 돌려받으려고 했으나 끝내 돌려받지 못하고, 결국은 현판의 소유에 관한 소송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 소송에서 요선계 측이 승소하여 어제시 현판은 요선정에 계속 걸려 있게 된다.
요선정은 1984년 강원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지정 당시에 100년도 안 된 건물이었지만, 위에서 본 것과 같이 주민들이 선대 임금의 유적을 지킨 것이 아마도 지정의 한 근거가 되었을 것이다. 요선정의 좌우로는 오래된 마애불과 석탑이 있는데, 전하는 얘기로는 신라 때의 절터라고 한다.
[요선암]
영월군 무릉도원면 무릉리의 요선암은, 태기산에서 발원하여 영월군 무릉도원면으로 들어와 흐르는 주천강에 사자산에서 발원한 법흥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있는 갖가지 기이한 모양의 바위들을 말한다. 무릉리 요선암의 바위는 2013년 영월 무릉리 요선암 돌개구멍이라는 명칭으로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돌개구멍은 지리학 용어로는 포트홀(pothole)이라고 하는데, 강바닥의 바위에 항아리나 원통 모양으로 난 구멍을 말한다. 돌개구멍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네 단계로 구분한다. 1단계는 자갈이 하천 바닥의 바위를 마모시키면서 여러 형태의 작은 구멍을 만드는 단계이다. 2단계는 작은 구멍에 들어간 자갈이 물살에 의하여 계속 구멍 안에서 회전하면서 구멍을 점점 크게 깎아 내어 마침내 커다란 구멍을 만드는 단계이다. 3단계는 빠른 물살과 모래나 돌이 구멍의 벽면에 부딪쳐서 포트홀의 벽면이 무너지는 단계이다. 4단계는 3단계에서 남아 있던 포트홀의 벽면도 다 깎여 나가 바위가 평평하게 되는 단계이다. 김경환 등의 연구[2012]에 의하면, 요선암의 포트홀은 22개인데, 그 가운데 1단계가 4개, 2단계가 5개, 3단계가 11개, 4단계가 2개라고 한다. 그리고 요선암의 포트홀은 성장 단계라기보다는 쇠퇴기에 해당되므로, 앞으로 기존의 포트홀이 소멸하면서 평탄한 바위가 될 것이라고 분석하였다.
요선암은 ‘신선을 맞이하는 바위’라는 뜻으로, 조선 명종 때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이 평창군수로 재직할 때, 이곳에 와서 바위 위에 ‘요선암(邀僊巖)’이라는 글자를 새겨 놓으면서 이런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요선암이 있는 지역은 워낙 벽지에 있기 때문에 요선암의 아름다운 경치도 전국적으로 알려지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요선암이 있는 지역을 지나가는 관리들 가운데는 요선암을 구경하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었다. 김귀주(金龜柱)[1740~1786]는 18세기 후반의 중요한 정치인인데, 김귀주의 『가암유고(可庵遺稿)』에는 1767년 강원도관찰사가 되어 강원도 일대를 순시하면서 요선암의 뛰어난 경치를 구경하고 싶어 하였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요선암의 기이한 바위들은 포트홀이라는 지리학적 현상인데, 그 아름다운 경관은 지리학적인 설명만으로는 다할 수 없다. 주천강과 법흥천이 만나는 지점에 형성된 이 자연의 현상은 오래 전부터 사람들에게 깊은 감흥을 안겨 주었다. 300년 이상 된 무릉도원면의 요선계는 요선암에서 그 이름을 따온 것이다.
요선계는 최근까지 그 전통을 이어 가고 있는데, 지금도 봄가을로 일 년에 두 번씩 모임을 갖는다. 대표는 요선계의 창립 멤버인 이씨, 원씨, 곽씨 중에서 돌아가며 맡으며, 임기는 2년이다. 계원들은 1년에 쌀 2말에 해당하는 금액을 회비로 내는데, 현재 100여 명의 회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선계는 약간의 임야와 기금을 갖고 있으면서, 상호부조와 장학 사업 등을 하고 있다고 한다. 요선계의 계원들은 이미 망해 버린 조선의 임금이 남긴 유물을 지키기 위하여 상당한 돈을 쓰고, 또 이 현판을 걸어 둘 요선정을 1913년에 지었다. 1913년이면 조선은 이미 식민지로 전락하고 일본 세력이 득세한 시기인데, 이 시기에 무너진 빙허루의 재목과 현판을 당시 주천면에 주둔한 일본인 헌병대파견소 소장이 구입하였다는 것도 당시의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이 조선의 임금이 쓴 글을 새겨둔 현판을 다시 찾아온 것이 요선계의 계원이라는 것 또한 당시의 상황을 보여 주는 또 다른 하나의 상징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요선정은 요선암이라는 빼어난 풍광에서 나온 이름이지만, 이 이름에는 이 지역에서 대대로 살아오면서 지역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있던 요선계 구성원들의 지극한 정성이 스며 있다. 비록 4칸의 작은 정자에 불과하지만, 요선정은 자연과 인간 그리고 역사가 함께 녹아 있는 곳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