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500477
한자 兵馬節度使朴毅長神道碑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건물
지역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수리 458-3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창국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677년연표보기 - 병마절도사박의장신도비 건립
현 소재지 병마절도사박의장신도비 -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수리 458-3 지도보기
원소재지 병마절도사박의장신도비 -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수리 458-3
성격 신도비
양식 높이 23.5㎝[비석받침]|177㎝[비신]|너비 106㎝[비석받침]|74.5㎝[비신]|두께 66.5㎝[비석받침]|30㎝[비신]

[정의]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수리에 있는 조선 후기 신도비.

[개설]

1677년(숙종 3) 건립된 조선 후기 무신 박의장(朴毅長)[1555~1615]의 신도비이다. 박의장의 본관은 무안(務安), 자는 사강(士剛)이다. 김언기(金彦機)의 문인으로 경사(經史)에도 밝았다. 1577년(선조 10) 무과에 급제해 주부(主簿)가 되었고, 1592년 임진왜란 때 경주판관으로 있으면서 경주성의 탈환에 큰 성과를 거두었다. 1593년 5월 울산의 왜적을 물리친 공으로 경주부윤(慶州府尹)이 되었고, 이후 여러 전투에서 세운 공적으로 품계가 올랐다. 1600년(선조 33) 경상좌도병마절도사(慶尙左道兵馬節度使), 1602년에는 경상수사((慶尙水使)가 되었다. 사후 호조판서(戶曹判書)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무의(武毅)이다.

[위치]

병마절도사박의장신도비(兵馬節度使朴毅長神道碑)창수면 수리에 있는 수동저수지 입수부의 밭 위에 있다. 신도비의 북서쪽에는 박의장의 재실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덕후루(德厚樓)가 있고, 덕후루의 맞은편 능선상에는 박의장의 묘소가 있다.

[변천]

신도비는 1677년에 건립되었으며, 김응조[1587~1667]가 비명을 찬하고, 노이흥이 글씨를 썼다. 우측면의 간지 뒤에는 1784년(정조 8) '무의(武毅)'라는 시호를 받았음이 추가되어 있다.

[형태]

신도비는 사면에 문양이 있으나 하부가 일부 매몰되었으며, 상면에 연화문이 새겨진 비석받침[높이×너비×두께, 23.5㎝×106㎝×66.5㎝]과 원수형(圓首形)의 비신[177㎝×74.5㎝×30㎝]으로 구성되어 있다. 비신 상부에는 비제(碑題)가 가로[우→좌]로 새겨져 있는데, 전면은 '증호조판서행(贈戶曺判書行)', 좌측면은 '병마(兵馬)', 후면은 '절도사박공신(節度使朴公神)', 우측면은 '도비(道碑)'이다. 전면부터 시작하여 좌측면, 후면에는 박의장의 행적과 비명이 새겨져 있다.

우측면의 우측에는 '통정대부 전 사간원 대사간 풍산 김응조 찬(通政大夫前司諫院大司諫豊山金應祖 撰)'과 '안강 노이흥 서(安康盧以興 書)'가, 좌측에는 '숭정 갑신[1644년] 후 이십사년 정미[1677년] 시월 일 립(崇禎甲申後二十四年丁未十月日立)'과 '정묘 갑진[1784년] 사시 무의(正廟甲辰 賜諡武毅)'가 새겨져 있다.

[현황]

신도비는 보존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비문은 약간의 퇴락이 있으나, 전체적으로 육안 관찰이 가능한 상태이다.

[의의와 평가]

신도비는 재실인 덕후루, 묘소, 축산면 도곡리에 있는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된 영덕 무안박씨 무의공파 종택 등과 함께 박의장과 관련된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박의장의 생애와 임진왜란 때의 활약상을 되새겨볼 수 있는 교육 장소로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