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3015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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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생활·민속/생활 |
유형 | 물품·도구/물품·도구 |
지역 | 경기도 양주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최미선 |
출토|발견 시기/일시 | 1990년대 - 호리쟁기 발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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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처 | 농기구민속박물관 - 경기도 양주시 은현면 그루고개로 477[도하리 99-2] |
성격 | 농기구 |
재질 | 쇠|나무 |
용도 | 논이나 밭을 가는 데 쓰는 농기구 |
[정의]
조선 시대 경기도 양주 지역에서 사용된, 소 한 마리의 힘을 이용해 논밭을 가는 쟁기.
[개설]
쟁기는 땅을 갈아엎어 잡초를 제거하고 토양을 다공성(多孔性)으로 만들기 때문에 농사에 반드시 필요한 기구였다. 호리쟁기는 한국의 전통 쟁기 중 하나로, 중부 이남의 평야 지대에서 주로 사용하였다. 양주시 은현면 도하리에 있는 농기구민속박물관에 조선 시대 경기도 양주 지역에서 사용된 호리쟁기가 전시되어 있다.
[연원 및 변천]
쟁기는 땅을 파거나 뒤집는 데 사용하였던 뒤지개나 따비에서 발달한 것으로, 처음에는 사람이 끌었으나 점차 소나 말 등을 이용하였다. 우리나라에서 가축을 사용한 쟁기의 사용은 기원전 3000년 무렵의 황해도 봉산군 문정면 지탑리의 신석기 유적에서 발굴된 긴 타원형의 돌보습에서 처음 찾아볼 수 있다. 이후 평안북도 염주군 주의리의 유적에서 기원전 1000년경의 원시적인 형태의 쟁기가 발굴되었고, 대략 기원전 500년경 이후에는 완성된 모습의 쟁기가 나타났을 것으로 추측된다.
호리쟁기는 논밭의 지질적 특성에 따라 사용하는 쟁기를 구분하면서 나타난 명칭으로, 갈기가 수월한 논밭을 갈 때 소 한 마리에 메우는 쟁기를 지칭한다. 따라서 황해도와 강원도 북부를 경계로 하여 평야 지대가 많았던 남쪽 지방에서 주로 사용되었으며, 평야 지역이 많은 경기도 양주 지역의 곡창 지대에서도 사용되어 왔다.
[형태]
호리쟁기의 몸체는 성에와 술, 한마루를 세모꼴로 맞춤 모양을 띠고 있으며, 술 끝에 땅을 가는 보습을 달고, 보습 위에 갈린 흙을 떠넘기는 볏을 덧댄 구조로 되어 있다. 보습과 볏은 쇠로 되어 있고, 나머지 부분은 모두 나무로 되어 있는데, 성에와 술을 꿰뚫어 곧게 서 있는 나무를 한마루라고 한다. 한마루에는 한두 개의 구멍을 뚫어서 땅을 가는 깊이에 따라 술의 각도를 조정할 수 있도록 하였다. 술의 중간 부분에는 네모난 한마루 구멍이 있으며, 끝은 펀펀하게 되어 있다.
술 바닥에 땅을 갈아엎는 구실을 하도록 끼운 쇠를 보습이라고 하는데, 보습의 형태나 크기는 지역이나 토양, 쟁기의 종류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전통 쟁기에서는 대체로 삽 모양의 보습이 사용되었고, 보습 위에는 쇠판을 비스듬하게 덧대어 보습에서 갈린 흙덩어리[볏밥]을 받아 한쪽으로 떠넘어가도록 하였는데, 이를 볏이라고 한다.
쟁기의 손잡이로 술 위쪽 끝이 뾰족한 부분을 자부지라고 하며, 성에 앞 끝에 가로로 하여 줄로 연결하는 막대기를 물추리막대라고 한다. 쟁기의 성에와 물추리막대 그리고 소의 목에 얹는 멍에를 연결하는 줄을 봇줄이라고 하며, 비잡이라고도 부른다. 성에 앞 끝에 매어 물추리막대를 연결해 멍에 양쪽에 이르게 한다. 호리쟁기는 무게가 15㎏ 내외이다. 술은 박달나무처럼 질이 단단한 것으로 만들어 몸체는 20여 년 정도 쓸 수 있지만, 보습은 한 해에 한 번씩 갈이를 해 주어야 한다.
[생활 민속적 관련 사항]
한반도를 가로지르는 한강 하류 유역의 북쪽에 위치한 경기도 양주 지역은 교통의 요지인데다 기후가 온화하고 토지가 비옥하여 농업과 그에 따른 농업 기술이 발달하였다. 따라서 양주 일대에서 농경과 관련된 많은 수의 유물들이 출토되었다는 것은 양주 지역이 농경에 적합한 지역이었음을 입증하고 있다. 농기구민속박물관에서 보관 중인 호리쟁기 역시 양주의 지리적 특성과 농사의 풍속을 잘 보여 주는 유물로 파악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