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2010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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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孟俊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대사리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권대웅 |
[정의]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이맹준(李孟俊)[1897~1948]은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대사리 출신으로, 대사동 독립 만세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15일 이맹준은 대사동의 주민들과 함께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하고, 그날 오후 7시 1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이어서 16일 오후 8시에도 1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기도동을 거쳐 창길동까지 행진을 한 후 자진 해산하였다.
17일에는 오후 8시경 15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대사동 우리곡(尤利谷)에서 만세 시위를 시작하여 안평면 마전동·기도동·괴산동을 돌자 시위대는 400여 명으로 불어났다. 이들은 창길동의 안평 주재소에 앞에 당도하여 10여 분간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 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시위 군중은 창길동을 거쳐 화령동까지 만세 시위를 전개하고 해산하였다.
3월 18일 밤에는 전날보다 더 많은 300여 명의 군중들과 더불어 대사동 우리곡에서 만세를 부른 후 다시 안평면 마전동·기도동·창길동·박곡동·괴산동을 누비며 시위를 벌였다. 시위 군중들은 안평 주재소를 습격하였고, 일본인 순사 부장과 한인 순사 및 군청 직원 등을 제압한 뒤 만세를 부르도록 했다. 3월 19일 4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안평 주재소로 몰려가 만세 시위를 전개한 후 박곡동·석탑동·신월동을 거쳐 불어난 시위 군중 700여 명과 함께 봉양면 도리원 장터로 나아갔다.
이맹준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19년 5월 13일 대구 지방 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언도 받고, 6월 18일 대구 복심 법원에서 징역 10월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1990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