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2010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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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錫洪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권대웅 |
[정의]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박석홍(朴錫洪)[1896~1985]은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에서 출신으로, 중국 흑룡강성(黑龍江省) 아성현(阿城縣)에서 강화인(姜化仁)·박삼근(朴三根) 등과 함께 북만 조선인 청년 총동맹(北滿朝鮮人靑年總同盟)을 조직한 뒤 선전 부장이 되어 잡지 『농군(農軍)』을 발간하면서 목단강(牧丹江) 일대의 재만 동포들에게 독립 사상을 고취하였다. 그 후 1924년 흑룡강성 산시(山市)에서 신민부(新民府) 기관지 『신민보(新民報)』의 논설 위원으로 배일 사상 확산을 위한 선전 활동에 진력하였고, 1925년 아성(阿城)에서 김훈(金勳) 등과 함께 잡지 『혈청년(血靑年)』을 발간하여 혁명적 국권 회복 방략의 당위성과 그 투쟁 방법을 선전하였다.
1927년 이백파(李白波)와 함께 고려 혁명군(高麗革命軍)을 조직하여 중앙 선전 부장으로 활동하면서 서울의 일본인 집단 살해 계획을 추진하였다. 1927년 1월 중국 중동선(中東線) 해림(海林)에서 단두단(斷頭團)의 명의로 경상북도 영일군(迎日郡) 신광면(神光面)의 이동빈(李東彬)에게 독립운동 자금 1만 5천 원의 기부를 요구하는 편지를 띄워 놓고 비밀리에 입국하려다 일경에 체포되어 동년 9월 27일 청진 지방 법원에서 소위 치안 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그는 출옥 후에 무정부주의 노선으로 만주 지역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하려 하였으나 동지들이 흩어져 뜻을 이루지 못하자 귀향하였다. 『고등 경찰 요사(高等警察要史)』에 의하면, 박석홍은 ‘출옥하여 돌아 온 뒤에는 무정부주의로 돌아서 전기 이홍근 기타의 무정부주의자와 빈번하게 통신을 교환하고 주의 운동의 진출을 획책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박석홍은 일본 경찰의 끊임없는 감시를 받으면서 20여 회의 예비 검속을 당했다고 한다.
[상훈과 추모]
1993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