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2010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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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萬寧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 시안리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권대웅 |
[정의]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박만녕(朴萬寧)[1898~1967]은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괴산리 출신으로, 비안면에 있는 비안 공립 보통학교(比安公立普通學校) 학생으로 상급 학생으로 급장(級長)이던 우희원(禹熙元)·박기근(朴基根)[혹 朴望牙]·정인성(鄭寅成) 등과 함께 3월 9일부터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 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서울·평양·대구 등지의 독립 만세 운동에 고무되어 3월 11일 비안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하였으나 일본 경찰의 삼엄한 감시 때문에 거사를 중단하고 말았다.
박만녕은 3월 12일 전교생과 함께 학교 뒷산에 올라가서 만세를 부르기로 하였다. 학생들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된 교장은 급장 6명을 교장실로 불러 훈계를 하며 시위를 만류하였으나, 이 사이 150여 명의 학생들은 뒷산으로 올라 가서 일제히 독립 만세를 불렀으며, 교장의 설유를 듣던 급장 4명도 뛰쳐나와 합세하였다. 만세 시위를 벌이던 학생들은 출동한 일본 경찰과 교사들에 의해 강제로 해산 당했다. 주동 학생 우희원·박기근·정인성 등은 검거되었고, 그는 피신하여 종적을 감추었다. 박만녕은 1921년 체포되어 대구 지방 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3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1992년에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