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2010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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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魯洙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권대웅 |
[정의]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박노수(朴魯洙)[1907~?]는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출신으로, 1920년대 서울에서 공학회(共學會)·서울 학생 구락부·경성 청년회, 그리고 일본에서 신간회 동경 지회 등에 가입하여 항일 민족 운동을 전개하였다. 1925년 8월 30일 의성군의 옥산면·점곡면·단촌면 청년 박명옥(朴明玉)·유시언(柳時彦)·김성윤(金成允) 등과 함께 의성 지역의 초기 청년 운동 조직인 을축 청년회(乙丑靑年會)의 결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925년 서울에서 이종율(李鍾律)·권혁(權赫)·조치기(趙致基) 등 전문학교 및 중등학교 학생 60여 명이 창립한 사회 과학 연구 단체 공학회(共學會)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25년 11월 공학회의 좌경적 강령이 문제되어 해산한 뒤, 그는 청년 운동 단체인 서울 학생 구락부(學生俱樂部)·경성 청년회(京城靑年會) 등에 가입하여 항일 민족 운동을 전개하였다.
1926년 학생 운동 기관지인 『학거사(學車社)』의 남선 특파원(南鮮 特派員)으로 임명되어 각지를 순회하며 활동하였다. 그리고 같은해 여름에는 만주의 독립운동 단체 신민부(新民府)가 독립운동 군자금의 모집과 밀고자의 처단을 목적으로 요원을 파견하자 그를 도와 활동하던 중 일본 경찰의 추적을 피해 귀향하였다.
1927년 동경으로 건너가 와세다 대학[早稻田大學] 전문부(專門部)에 입학한 후 전진한(錢鎭漢)·함상훈(咸尙勳)·이선근(李瑄根) 등과 함께 신간회(新幹會) 동경 지회(東京支會) 설립에 참가하여 정치 문화부에서 활동하였다. 1929년 서울에서 신간회의 분규를 수습하던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수개월 동안 조사를 받았다. 그 후 만주·일본 등지를 왕래하면서 동지들과 함께 독립운동의 방안을 모색하였으나 여의치 않자 귀국하여 낙향하였으며, 그 후 8·15 해방까지 일본 경찰로부터 여러 차례 구금과 조사를 받았다.
[상훈과 추모]
1977년에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고, 1990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