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200873
한자 李羲發
이칭/별칭 우문(又文),운곡(雲谷),이영발(李英發)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산운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광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768년연표보기 - 이희발 출생
활동 시기/일시 1795년 - 이희발 문과에 급제
활동 시기/일시 1795년 - 이희발 초계 문신에 발탁
활동 시기/일시 1799년 - 이희발 친시에 장원 급제
활동 시기/일시 1849년 - 이희발 형조 판서에 임명
몰년 시기/일시 1850년연표보기 - 이희발 사망
추모 시기/일시 1863년 - 이희발 희정공 시호 책봉
출생지 이희발 출생지 - 울산광역시 북구 화봉동
거주|이주지 이희발 거주지 -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산운리지도보기
수학지 달성 - 대구광역시
외가|처가 학성 화산 - 울산광역시 북구 화봉동
부임|활동지 영해 부사 -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읍
부임|활동지 영해 부사 - 강원도 영월군
묘소|단소 금학산 노적봉 -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수정리
사당|배향지 유초각 -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수정리지도보기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영천(永川)
대표 관직 형조 판서

[정의]

조선 후기 의성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우문(又文), 초명은 영발(英發), 호는 운곡(雲谷). 이수춘(李秀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덕방(李德枋), 아버지는 이의명(李宜明), 어머니는 파평 윤씨(坡平 尹氏)로 윤덕은(尹德殷)의 딸이고, 부인은 진성 이씨(眞城 李氏)로 이귀락(李龜洛)의 딸이다. 이 집안은 16세기 이래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산운리에 세거 하고 있다.

[활동 사항]

이희발(李羲發)[1768~1850]은 어려서부터 의연함과 효성을 갖추었다고 한다. 15세에 아버지의 뜻에 따라 정동필(鄭東弼)에게 수학하였다. 일찍이 경상도 달성(達城)의 암자에서 독서를 하니, 어느 노승이 ‘경(敬)’에 대해 말하는 그를 보고 진정한 군자를 만났다고 말했다 한다. 1795년(정조 19)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규장각(奎章閣)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선발되어 정조와 여러 차례 학문을 토론하는 자리를 가졌다.

1797년 명릉 별검(明陵 別檢), 이듬해 효릉 별검(孝陵 別檢)을 지냈다. 1805년(순조 5) 예조 좌랑(禮曹 佐郞)이 되고, 이어 병조 정랑(兵曹 正郞), 사간원 정언(司諫院 正言),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 사헌부 장령(司憲府 掌令)에 제수되었으며, 1809년 고산도 찰방(高山道 察訪)에 제수되었으나 노친의 봉양을 이유로 부임하지 않았다. 1811년(순조 11) 사헌부 장령(司憲府 掌令), 사간원 헌납(司諫院 獻納)을 거쳐 1815년 사간원 사간(司諫院 司諫)이 되었다. 1816년 영해 부사(寧海 府使)로 나아갔다가 돌아와 1819년 사간, 집의(執義)를 지냈다. 1822년 세자시강원 필선(世子侍講院 弼善)을 지낸 뒤, 이듬해 모친상을 치르고 1825년 사헌부 집의와 사간원 사간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직하고, 보익동궁소(輔翼東宮疏)를 올렸다.

1826년(순조 26) 영월 부사(寧越 府使)로 나아갔다가 1830년 동부승지, 1833년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 1843년(헌종 9) 헌종정조 때 법종(法從)으로 초계(抄啓)된 사람으로 가자(加資)되고, 1847년(헌종 13) 병조 참판(兵曹 參判)을 거쳐, 1849년 형조 판서(刑曹 判書)가 되었으나 노병으로 사직하였다.

[학문과 저술]

1899년 후손들이 간행한 문집으로 『운곡집(雲谷集)』 21권 11책이 전한다. 문집 가운데에는 「중용강의조대(中庸講義條對)」와 「주자대전고식(朱子大典故寔)」과 같이 정조와 학문을 토론하며 이야기했던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그의 학문적 수준을 알 수 있다.

[묘소]

묘는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수정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1863년(철종 14) 희정공(僖靖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수정리 금성산에 있는 용문정(龍門亭)에 그의 영정이 보관한 유초각(惟肖閣)이 있다. 원래 용문정은 이희발이 강학을 위해 건립한 정자인데, 퇴락한 것을 1924년 후손 이홍(李鴻)이 개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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